우리는 어느 순간에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 생각은 직관적인 사고에 의존하는 시스템1과  냉정하게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시스템2의 영향을 받는다.

시스템1은 빠르게 동작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감정의 영향을 받으며, 시스템2는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장점이 있지만 게으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감정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어떤 일을 대하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이 책은 우리 인간 사고의 시스템을 정의하고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얼마나 직관에 따라 결정되는지를 보여준다.

고통이라는 것도 합리적으로 볼때 적은 양의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 객관적이지만,

우리는 처음과 마지막의 강도에 따라 개인적으로 선택하는 오류를 보인다.

심지어 행복이라는 것도 누군가 행복하느냐를 물으면 인생 전체에 대해서 행복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오늘 아침 출근길의 교통 체증상태에 대한 마음으로 행복을 말한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한 번쯤은 시스템1에 의해서 판단하고 있는게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는 게 적을수록 감정에 의해서 직관적으로 판단할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 합리화 한다는 것.

인간은 자기 기억조차도 조작한다.

 

1달이 넘는 시간을 쉬엄쉬엄 읽어왔다.

이 책은 인간을 한층 깊이 분석한 무게있는 책이다.

이런 책을 읽으면서 인문학이  더욱 발전되어 가고 있으며, 시대의 발전에 맞추어 독서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과거의 학습만으로는 아집에 사로잡히기 쉽다.

아래 내용은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옮겨 담은 것이다.

 

직관은 결함을 수반한다.

 

무엇에 지나치게 열심히 집중하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멀게 된다.

우리는 명백한 것조차 못 볼 수 있으며, 자신이 못 본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

 

오랜 진화의 역사속에서 주의 할당능력은 섬세하게 개발되어 왔다.

심각한 위험이나 가장 유망한 기회에 관심을 갖고 재빠르게 반응하면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이 확대되었다.

현대인에게도 비상사태 시에 시스템1이 개입해서 자기 보호 행동에 전적으로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게으름은 우리 본성 깊숙이 박혀 있다.

 

나 또한 산책하면서 사색할 수는 있지만 단기 기억에 과부하가 걸리는 정신작업을 하진 못한다.

더 빠른 걸음으로의 전환은 논리 정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급격히 저하시틴다.

 

자제력에는 주의와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생각과 행동의 총제는 시스템2가 수행하는 여러 과제 중의 하나이다.

 

그의 말대로 정신 에너지란 단순한 은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신경 시스템은 다른 대부분의 신체 부위에 비해 더 많은 포도당을 소비한다.

노력이 필요한 정신활동은 특히 포도당 소비를 늘리는 듯하다.

 

시스템1은 빠르면서도 자주 정확한, 직관적 판단의 원천이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믿게끔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거짓말을 정기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낯익음은 진실과 쉽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2는 게으르며, 정신적 노력은 회피적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가능하다면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를 간결히 하라.

수용자들이 수고하고 노력해야 할 듯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아내어 간소화해야 한다.

 

좋은 분위기일 때 사람들은 더 직관적이고 창조적이 되는 반면, 경계를 풀고 논리적인 오류에 빠져들 확률이 높아진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는 신체적.의도적 인괴성의 분리 준비는 종교적 믿음이 사실은 보편적인 것에 가깝다는 걸 설명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 우리는 사물의 세계를 본질적으로 마음의 세계와 분리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영혼이 없는 육체와 신체가 없는 영혼을 상상하게끔 해준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인지하는 두 가지 인과관계 모드는 많은 종교들의 두 가지 핵심 믿음을 자연스럽게 수용시킨다.

이 믿음은 1)무형의 신이 물리적 세계를 창조한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과

              2)우리가 사는 동안 불멸의 영혼이 육체를 일시적으로 통제하며, 우리가 죽을 때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것이다.

블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두 인과성의 개념은 진화적인 힘에 의해 별개로 조성되면서 종교의 기원을 시스템1의 구조에 통합시켰다.

 

시스템1은 속기 쉽고 무엇이든 쉽게 믿으려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시스템2는 의심과 의혹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는 것이 거의 없을 때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을 정합적 패턴으로 통합하기가 훨씬 쉽다는 사실을 종종 깨달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개입되면 결론이 논거보다 영향력이 커지는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다.

 

의심을 지속하기란 확신에 빠지기보다 힘들다.

'적은 숫자의 법칙'은 우리가 가진 의심보다 확신을 선호하는 성향을 드러내준다.

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의 지속성과 정합성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시스템1은 여러 증거 조각들에 기초해 풍부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사실보다 앞서간다.

서둘러 결론 내리려는 기계는 적은 숫자 법칙을 쉽게 믿으려 할 것이다

 

나는 교관들이 '불행한 우연적 상황'의 덫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벌은 아무 효과가 없었는데도 교관들은 훈련 성과가 나빴을 때 생도들을 벌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그 어떤 이야기도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수많은 사건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머리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다루지 못한다.

 

내가 이 문장에서 '알다'가 잘못된 사용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이 단어가 세상을 실제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엄청나게 위험하며 치명적인 착각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과거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데서 착각의 본질은 그 싹을 띄운다.

이런 생각은 미래 역시 알 수 있다는 뜻이지만, 사실 우리는 이해한다고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모른다. 과거든 미래든 말이다.

이런 착각을 유발하는 단어가 '알다' 하나만은 아니다. '직관'과  '예감'도 이미 사실로 판명난 과거의 생각을 위해 준비된 단어들이다.

 

인간 사고의 한계는 그것이 과거의 지식 상태나 수정된 믿음을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새로운 세계관(아니면 세계에 대한 관점의 일부)를 갖게 된 사람은, 생각이 바뀌기 전에 소유하던 믿음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전에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믿지 못한다.

이처럼 특정 사건의 결과를 보고 난 후, 자기는 이미 진작부터 그런 결과를 확실히 예견하고 있었다고 믿는 현상을 '사후확신 편향'이라고 한다.

 

허술한 증거로도 충분히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신념 중에는, 그저 우리가 사랑하고 믿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한다는 것 외에는 어떤 증거도 대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이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 감안하면 자신의 믿음에 갖는 신뢰는 불합리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미래가 예상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매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과거 때문에 약해진다....

우리는 자기 예측력의 한계를 수용하길 어려워 한다.

 

그리고 오늘 느지막이 생각했을 때 이해되는 일이 이미 어제 예측 가능했다는 강력한 직관을 억누르기는 힘들다.

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예측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과신한다.

 

계획 오류는 만연되어 있는 낙관적인 징후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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