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읽은 책중에 으뜸이다.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라이밍은 사람들과 딱히 목적 없이 어울려 다니며 즐기는 행위를 뜻하는 은어로 자리 잡았고

이 특별한 카리브해의 은어가 만들어낸 문화 속에서 훌륭한 풍자와 칼립소 음악, 좋은 시가 탄생했다.

특별한 일은 별일 없을 때 탄생한다.

당신에게 인생 마지막 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초점을 어디에 두든, 눈길은 밖으로도 안으로도 향해야 한다.

작은 것은 큰 것을 비추고 인간은 섬이 아니며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다름'이다.

삶의 비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일 뿐이다.

 

삶의 의미는 지속 가능하고 중립적이며 자유롭다.

삶의 의미는 관계로 이루어 진다.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근원이란 음식을 나누고 함께 식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귀찮은 의무가 없고 권리 뿐인 개인으로 사는 것이 재미있고 자극적일 수 있지만

이는 순풍이 불 때만 유효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움과 불안감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당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존중하고 이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느냐다.

 

자녀와의 관계를 통해 경험하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배려, 겸손, 자기 확신은 더 없이 소중한 삶의 덕목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버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용서와 겸손, 감사의 능력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철학이 가진 보편적인 문제점은 플라톤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철학자 대부분이 미혼 남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론을 넘어서는 것들,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사랑이라는 가느다란 실, 그 실이 끊어질 때 열리는 깊은 심연,

배신당했을 때 분출되는 비이성적인 분노, 폭풍이 가라앉은 후 사람들을 다시 연결시키는 끌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사회가 없으면 개인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가장 두꺼운 실 즉 가장 가까운 타인, 의미있는 타인으로부터 버림받거나 학대를 당할 때 가장 취약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존재감에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좋든 나쁘든 타인과 연결하는 실은 중요하다. 그 실이 보이지 않는 순간 인간은 완벽한 혼자가 된다.

삶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고

다른 어떤 생명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삶을 끝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무서운 순간이다.

 

무언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보통 자신의 약점과 취약성을 인식해야만 타인에게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이 있어야 한다.

8명의 가족과 방 하나를 공유하는 사람일지라도 혼자만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정신적인 무대의 뒤편이 필요하다."

전 세계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밀실에 들어간다.

 

결핍은 존재의 기본 조건이다.

얼어 죽기 직전인 사람에게는 몸 안에 단 하나의 소원을 품을 공간만이 남아 있다.

 

세계는 예전보다 심각한 물질적인 결핍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만,

지금은 다른 형태의 정서적 결핍이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방해하고 있다.

새로이 등장한 정서적인 결핍은 점점 그 존재가 커질 것이다.

 

무엇이든 감사할 수 있으려면 갈망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부유한 사람들은 보통의 풍족함을 누리는 사람들보다 덜 행복하다.배가 부르면 더 먹을 수가 없다.

 

인간은 부재를 통해 중요한 것에 대해 명확하게 집중할 수 있다.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꿈을 꾸고 희망을 품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영영 얻지 못할 수 있는 것을 오랫동안 고대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희망이 없으면 기대하는 것도 없고 우리는 절망적인 사람이 된다.

 

꿈속 세상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아무도 우리의 꿈을 빼앗을 수 없다.

꿈이 가능성은 삶을 견디게 해준다.
많은 꿈이 실현될 수 없고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중년 즈음부터는 누구나 세월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안다.

10년은 열 살 아이에게는 불가해한 시간이지만, 예순 살인 사람에게는 티타임정도로 느껴질 뿐이다.

이 드라마의 메세지는 '곧' '나중에'라고 미루면 그땐 너무 늦다는 사실이다.

극도의 청춘 숭배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이를 인정하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시간은 내 내부와 외부에서 만들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맹렬한 속도를 피하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틈새를 만들 수 있다.

가속화되는 정보화 시대에는 자기 이해가 결핍된다.

다양한 소비로 시간의 틈새를 메워버리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38세가 되던 해 은퇴하고 외딴 탑에 칩거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삶의 속도를 늦춰야 했다.

 

희망이 꼭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희망은 보통 내 주변 세계 안에서 존재하니까....

세상이 정도를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보통의 삶을 거부하면 희망의 화살이 아래로 향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의미도 없고 삶의 질을 높이지도 못한다.

어둠을 저주하기보다는 촛불을 켜는 것이 향상 더 나은 법이다.

꿈과 희망은 비현실적일지라도 결국엔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낙관주의에 불을 붙인다.

 

숨가쁜 우리 시대에 가장 결핍된 것이 있다면 바로 느림일 것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되어야 비로소 날아오른다는 원리다.

어떤 형상이 극에 달해 사라지기 직전에야 비로소 눈에 띄고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혜는 황혼에 찾아온다.

 

느림은 세상이 정신없이 숨 가쁘게 돌아갈 때 균형을 잡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사람은 느리게 사는 능력을 잃을 때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온통 새로움에 중독되어 과거를 잊고 지금의 여기만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에 달려 있다.

미래와 과거가 연결된 경첩이 부서지면, 남는 것은 미친 듯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뿐이다.

 

나를 연결하는 기억의 실들이 많을수록 당신은 주변 환경과 더 조화롭게 살 수 있다.

 

시간을 덜 가진 사람들은 도리어 조급함에 시달리지 않는다.

19세기 중서부 유럽에서 땅을 개간하고 소작한 집을 지어 검소하게 생계를 이어갔던 북유럽 천착민들은 자신도,

심지어 자녀도 아닌 손주의 미래에 투자했다.

 

순환적인 시간과 선형적인 시간의 차이는 쉽게 눈에 띈다.

순환적인 시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건들이 경건하게 반복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현재의 시간에 치중한 나머지 지금 여기가 가득 차버리면, 미래뿐 아니라 과거를 위한 틈이 사라진다.

순간의 폭압은 이럴 때 발생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인 만족이 강박에 사로잡힐까?

매사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선택한다는 인간의 약점 때문일 것이다.

 

느림이 없으면 삶은 숨이 막히고,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머리와 꼬리도 구분할 수 없이 꿰매진 조각이 되고 만다.

나무는 뿌리에서 위로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

추운 겨울을 나는 나무는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생존에 필요한 휴식을 취하며 위쪽만큼이나 아래쪽으로도 자란다.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건 가치있는 일이다.

긴 삶의 여정에서 작은 톱니바퀴나 먼지 한 줌이 되는 것만으로 의미있는 삶을 살기에 충분하다.

 

느림은 규칙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시들어버리는 삶의 근육이다.

삶의 두게와 풍요로움은 당신이 묶을 수 있는 삶의 질과 양에 달여 있다.

 

암 전문의가 말기 환자에게 하는 전형적인 조언은 "여기, 이 순간을 살라"는 것이다.

언젠가 너무 늦어버린 순간이 될지 알 수 없으므로 완벽한 대를 기다리며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긴 시간도 순간으로 쪼개질 수 있다.

때문에 당신은 모두와 함께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모든 시간은 지금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생은 제로섬 게임과는 정반대다.

식사를 하는 동안 식욕은 커지고 더 많은 추억을 공유할수록 더 많은 것이 남는다.

 

순간이면 충분하다.

아무리 짧은 순간도 충분히 의미있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삶에 만족할 수 있다.

 

힘들고 고단한 일상이 매일 이어지지만 그들은 매 순간을 즐겼다.

 

"이미 일어난 일로 내가 무너지지 않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이 두렵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그 같은 충격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으니까."

 

순간이 매일의 삶에 소금과 양념을 더해주는 것은 맞지만,

실체와 방향을 말해주는 것은 '긴 지금'과 '큰 여기'다.

 

놀라움과 호기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완전하게 통제되고 계획된 삶을 고집하는 사람은 '놀랄 권리'를 포기하는 셈이다.

새롭고 예기치 못한 것을 경험하는 놀라움을 버리는 것이다.

 

삶은 작은 개인부터 내가 아끼는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혹은 만나지 못할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궁극적으로 선하고 의미있는 삶은 올바른 균형을 찾는 데 달려있다.

 

인생의 의미는 행복과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우다이모니아(행복, 잘 사는 것)는 단순히 삶을 즐기는 것보다 더 충만하고, 더 깊고,

더 풍요롭고, 궁극적으로 더 진지한 개념이다.

행복보다는 미덕에 가가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의미잇는 삶이 반드시 행복한 삶일 필요는 없다.

행복한 삶이 때로는 방향성 없고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공허한 삶일 수도 있으니까.

 

판단의 근거가 될 경험과 생각이 많을수록 균형을 이루기가 쉬워진다.

극단주의는 미성숙한 사람들의 생각이고 독단주의는 불안의 한 증상이다.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면 지루할 틈이 없다.

내 뇌안의 더 많은 시냅스를 활성화할수록 더 많은 연결을 촉진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정의하는 존재다.

 

우리는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때가 되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

겹겹이 시체가 묻힌 묘지 아래 풀이 우거진 언덕에 앉아 공상에 잠길 수도 있어야 한다.

세상은 다채롭고 가능성이 풍부한 곳이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내려놓아야 할 때도 분명 있다.

세상은 당신이 없어도 잘 돌아가지만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세월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인생은 으미로 가득차 있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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