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과 나>, <부모님과 나>, <선생님의 유서>로 구성된 소설

주요 내용은 결국 선생님의 과거 그리고 자살에 대한 것이다.

이념이든 가치든 순수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공허함과 상처를 만들어낸다.

 

가엾은 선생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사람에게,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 그만두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남이 반가워하는 것에 응하지 않는 선생님은 남을 경멸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경멸한 것이다.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논쟁은 싫어요. 남자들은 툭하면 논쟁을 벌인다니까요. 재미있다는 듯이요.

빈 잔으로 어쩌면 그렇게 질리지도 않고 술잔을 잘도 주고 받을 수 있는 건지."

 

오히려 지나치게 예민해서 자극을 견딜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자네도 알다시피 소극적인 세월을 보내게 된거지.

그래서 일단 약속을 한 이상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마음이 무척 불편하다네.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은 향을 피우기 시작한 순간에 제한되는 것처럼, 술 맛이 느껴지는 것은 술을 마시기 시작한 찰나인 것처럼, 사랑의 충동에도 그런 아슬아슬한 순간이 시간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아무렇지 않게 그 순간을 지나치고 나면, 익숙해질수록 친밀감이 더해 질 뿐 사랑의 신경은 점점 마비되어갈 뿐이지.

 

자네가 아는 나는 먼지에 더럽혀진 후의 나라는 것을.

더럽혀진 햇수가 긴 사람을 선배라고 한다면 나는 분명히 자네보다 선배겠지.

 

내가 적대시하는 숙부며 숙모며, 그 밖의 친척들을 마치 인류의 대표자인 것처럼 생각했다.

기차에 타서도 옆 사람을 넌지시 주의했네.

 

나는 돈에 대해서는 사람들을 의심했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아직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았네.

따라서 남이 보면 이상한 것이라도,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모순된 것이라도 내 가슴속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양립할 수 있었지.

 

요컨대 아주머님을 비롯하여 이 집 식구들이 비뚤어진 내눈이나 의심 많은 모습을 아예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 내게 큰 행복을 가져다주었지. 내 신경은 상대에게 반사되어 돌아오지 않았기에 점점 안정을 찾아갔네.

 

진정한 사랑은 신앙심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아가씨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신이 아름다워지는 기분이 들었네.

 

육체든 정신이든 우리의 모든 능력은 외부의 자극으로 발달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자극을 점점 세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으면 아주 험악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도 자신은 물론이고 옆 사람도 깨닫지 못할 우려가 생기는 거지. 의사의 설명을 듣자니 사람의 위장만큼 태만한 건 없다고 하네.

죽만 먹다 보면 그것보다 더 단단한 것을 소화할 힘이 어느새 없어진다는 거야. 그러니 의사는 뭐든지 먹는 연습을 해두라는 거지.

 

K가 들어오기 전에는 남이 손에 놀아나는 게 싫다는 고집이 나를 억눌러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지.

K가 들어온 뒤에는 어쩌면 아가씨가 K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나를 제지했네.

과연 아가씨 마음이 나보다 K에게 기울어 있다면 이 사람은 입 밖에 낼 가치가 없는 거라고 나는 결심했지.

창피를 당하는 것이 괴롭다는 것과는 좀 다른 거였어.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그럭저럭 안정되는 법이라는 이치를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열중해 있었지.

다시 말해 나는 아주 고상한 사랑의 이론가였던 거네. 동시에 가장 에둘러 가는 사랑의 실천가였던 셈이지.

 

그런 이유로 나는 어느 쪽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네.

몸이 안 좋을 때 낮잠을 자다 보면 눈만 뜨이고 주위의 사물이 확실히 보이는데도 도저히 손발을 움직일 수 없는 경우가 있잖은가. 나는 때로 그런 고통을 남몰래 느꼈다네.

 

그래서 놀랐지. 그의 묵직한 입에서 아가씨에 대한 그의 애절한 사랑이 흘러나왔을 때의 나를 상상해보게.

나는 그의 마법 지팡이로 단번에 화석이 된 거나 다름없었지. 내게서는 입술을 우물거리는 움직임조차 사라져버렸네.

 

나는 그저 아내의 기억에 어두운 한 점을 새겨 넣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털어놓지 않았던 거네.

순백의 사람에게 한 방울의 잉크라도 가차 없이 끼얹는 것은 나에게 큰 고통이었다는 걸 이해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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