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우주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잡아주는 책이다.

모든 사상 가치,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토대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이 책을 기준으로 삼으라고 권하고 싶다.

자신의 생각이 바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 사고에 집착하면 그것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2000년 전의 과학적 사고가 오늘날에 와서야 다시 이해되고 보편화된 지식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은 한정되어 있지만 무지에는 끝이 없다.

지성에 관한 한 우리는 설명이 불가능한 끝없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 섬을 조금씩이라도 넓혀 나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다 -토마스 헉슬리, 1887년-


안다는 것은 사람에게 기쁨이자 생존의 도구다.

인류라는 존재는 코스모스라는 찬란한 아침 하늘에 떠다니는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인류의 미래는 우리가 오늘 코스모스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에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회의의 정신은 공상과 실제를 분간할 줄 알게 하여 억측의 실현성 여부를 검증해 준다.

코스모스는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보물 창고로서 그 우아한 실제, 절묘한 상관관계 그리고 기묘한 작동 원리를 그 안에 모두 품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활동한 학자들 중에는 에라스토테네스 이외에도, 별자리 지도를 작성하고 별의 밝기를 추정한 히파르코스가 있었고,

기하학을 명쾌하게 체계화하고 어려운 수학 문제로 끙끙거리던 임금에게 "기하학에는 와도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건넨 유명한 유클리드가 있었다.

기하학에 유클리드가 있었다면. 한편 언어학에서는 트라키아의 디오니시우스가 있어 말의 품살르 정의하고 언어학의 체계를 확립했다.

생리학자였던 헤로필로스는 지능이 심장이 아니라 두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증명했도, 알렉산드리아의 혜론은 톱니바퀴 열차와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로봇에 관한 최초의 책 [오토마타]를 저술했다....

알렉산드리아와 그 대도서관을 낳은 고전 문명이 붕괴되면서 도서관도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장서의 극히 일부만이 후세로 전해졌고 그나마 남은 것도 사방으로 흩어져서, 고작 글 몇 줄, 종이 몇 조각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들이 전부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다 옳았지만 이 사실을 재발견하기까지 인류는 거의 2000여 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업적이 소실됐기에 느끼게 되는 우리의 애석함에 10만배를 곱하면,

고전 문명이 이룩했던 업적의 숭고함과, 그 파괴가 얼마나 큰 비극을 인류에게 안겨 줬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본질적으로 같은 단백질 분자와 핵산 분자가 모든 동물과 식물에 공통적으로 관여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생명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참나무와 나는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좀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동물인 나와 식물인 참나무의 조상은 같다.


지상의 모든 생물들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생명 현상이 보여 주는 분자 수준에서의 동질성으로부터 우리는 지상의 모든 생물이 단 하나의 기원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나무, 사람, 아귀, 심지어 변형균과 짚신벌레 같은 지구의 모든 생물이 과거로 올라가면 단 하나의 조상으로 수렴한다는 결론이다.


1666년 스물 세살의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생이 됐을 때 흑사병이 돌았다.

그래서 뉴턴은 자신이 태어난 외딴 고향 마을 울즈소프에 내려가서 어떤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고 1년의 세월을 편히 보낼 수 있었다.

뉴턴은 그 1년 동안에 미분과 적분을 발명했고 빛의 기본 성질을 알아냈으며 만유인력 법칙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이와 비슷했던 해를 하나 더 찾는다면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기적의 해"라 불렀던 1905년 뿐이다....

어쨌거나 뉴턴의 천재적 지력은 늙어도 지칠 줄 몰랐다.

1696년 스위스의 수학자 장 베르누이가 동료학자들에게 그 당시까지 미해결로 남아 있던 최속 강하선의 문제를 도전형식으로 제시했다...

라이프니츠는 당시의 선구학적인 학자로서, 뉴턴과는 독자적으로 미분법과 적분법을 발명한 수학자이다.

도전장이 뉴턴에게 전달된 시각은 1697년 1월 29일 오후 4시. 그때부터 그 다음 날 아침 출근 전까지,

뉴턴은 변분법이라는 전혀 새로운 분양의 수학을 발명했고 이것을 이용해서 최속 강하선의 문제를 해결한 뒤, 정리한 답을 돌려보냈다...

죽기 바로 전 뉴턴은 이렇게 썼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리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으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도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우주를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전체", 즉 코스모스를 봄으로써 우주를 인간의 이해 범주 안으로 끌여들였던 것이다.


토론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논지의 완벽함이지 그 논지가 지니는 권위의 무게가 아니다.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이들의 권위가 배우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장애의 요인으로 작용하여, 결국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판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든다.

권위의 무게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주어진 문제의 답을 스승이 내린 판단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피타고라스학파에서 통용됐던 이와 같은 관행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 키케로-


오늘날에도 과학 대중화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은 과학의 신성한 지식은 소수 집단의 전유물이며, 대중이 함부로 손대어 훼손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 사회에서 편히 살던 인물이었다.

그들은 노예 제도의 부당성에 괴로하기보다 오히려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지를 폈으며, 전제 독재 군주를 섬겼고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가르쳤다.

그들은 또 사상과 물질을 별개의 것이라고 가르쳤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은 하늘에서 지구를 분리시켰다.

이것이 서양의 정신세계를 2,000년 이상 지배해 온 분라의 사상이다.

"만물에 신이 깃들여 있다."라고 믿었던 플라톤은 자신의 정치관을 우주관에 연결시키기 위한 논지에서 사실 노예의 비유를 십분 활용했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데모크리토스가 불멸의 영혼이나 불멸의 신 또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신비주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가 하나의 행성이며 지구인은 우주 시민이라는 생각은 피타고라스 이후 3세기가 지난 뒤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아리스타를코스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오니아의 마지막 과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와서 지적 깨달음의 중심지가 위대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이미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이 행성계의 중심이고 모든 행성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첫 번재 인물이었다.

늘 그렇듯이 이 주제에 관한 그의 저술은 소실됐다.

그는 월식 중에 달의 표면에 드리워지는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태양은 지구보다 훨씬 크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옳게 추론했다.

그 다음에 따라올 결론은 뻔하다.

그는 태양처럼 큰 물체가 지구처럼 작은 물체의 주위를 회전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추론했다.

그는 지구 궤도 중심에 태양을 놓았다.

그리고 지구가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번씩 자전하는 동시에 태양을 1년에 한 번씩 공전한다고 가정했다.


인류 전체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몇몇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아직도 모호한 태도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고대 사회가 안고 있었던 내재적 모순의 상당 부분을 아직도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는 별의 기원과 진화와 그 부리에서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첫째, 우리를 구성하는 물질이 원자적 수준에서 볼때 아주 오래전에 은하 어디선가에 있던 적색 거성들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지구에서 발견되는 무거운 원소들 가운데 어떤 동위 원소는 태양이 태어나기 직전에 근처에서 초신성의 폭발이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는 생명의 탄생에서 별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넷째,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 활동이 결국 태양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식물은 태양의 빛을 받아서 빛 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변환시킨다. 농사가 무엇인가? 태양 광선을 조직적으로 추수하는 방법에 다름이 아니다.

마지못해 응하는 식물을 매개체로 하여 태양광선의 에너지를 긁어모으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 농업이다.

따라서 인류는 전적으로 태양의 힘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물질에서 출현한 생물이 의식을 지니게 되면서 자신의 기원을 대폭발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식할 수 있다니,

이것이 우주의 대서사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외계 은하들을 연구함으로써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상상을 초월한 규모로 벌어지는 격렬한 혼돈의 폭력 역시 우주의 한 속성이다.

우주는 자연과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은하와 별과 문명을 멸망시키는 파괴자이다.

우주는 반드시 자비롭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적의를 품지도 않는다.

우주 앞에서 우리의 생명, 인생, 문명, 역사는 그저 볼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협박은 실행으로 옮겨질 위험을 반드시 동반한다.


과학에는 고유한 특성이 잇다.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줄 안다는 것이 하나의 특성이다.

또한 모든 분야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또 다른 특성이 있다.

그리고 과학하기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단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성불가침의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가정이란 가정은 모조리 철저하게 검증돼야 한다. 과학에서 권위에 근거한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두 번째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무조건 버리거나 일치하도록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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