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통찰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기존에 언급된 어느 책보다 논리적이고 깊이가 있다.

생물의 기원도 어느 순간에 밝혀질 것이라 과학에 기대해볼만하다


과학이론은 추측이나 추론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세계에 대한 증거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틀이다.

훌륭한 과학이론은 예전에 설명디지 않았던 광점위한 자료들을 납득이 가도록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과학이론은 검증 가능한 예측을 해야 하며, 반증 가능해야 한다....

만일 한 이론이 검증이나 반증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과학이론이 아니다.


현재 진화론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빈화는 일어난다. 즉 현생 종은 과거에 살았던 다른 종의 후손이다.

둘째, 진화적 변하는 수천 년 혹은 수백만 년에 걸친 개체군의 점진적인 유전적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셋째, 생명의 새로운 형태는 하나의 계통이 두 개로 가라짐으로써 생긴다. 이 과정을 종 분화라고 한다.

넷째, 진화는 대부분 자연 선택을 통해 일어난다.


의식, 특히 감각적 인식은 독특한 현상이다.

각자 눈길을 주고 경탄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듯이, 깨어 있는 매순간 우리는 내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한다.

우리는 감각과 감정의 주체다.

우리는 열, 볼이 붉은색, 레몬의 신맛,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내 감각의 공간은 내 공간, 그 어떤 순간보다 내 자신이 되는 공간이다.


유한한 인간의 뇌가 무한이 개념을 생각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 인간의 뇌는 무한의 개념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무한의 개념이 무한한 개념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자연선택의 힘이 지금과 같은 방식의 의식을 경험하는 마음을 설계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중요한 조건은 그대로다.

다윈주의의 기본 전체는 자연선택의 생물학적으로 적응적인 형질들을 선택하고 그럼으로써 더 큰 번식의 성공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우선 의식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심리 한가운데에 본질적인 어떤 것, 즉 나다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감각을 갖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의식을 경험하면, 자아가 생긴다.

그 한가운데에 의식을 갖고 있는 자아는 무실할 수 없는 자아이며, 지닐 가치가 있는 자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아는 우리가 사적인 정신적 삶을 조직할 때 중심원리가 될 만한 잠재력으로 충만하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 고래, 개, 원숭이- 아마 모든 표유류, 모든 조류-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할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 적응도로 되돌아온다.

분명한 방식으로, 또 은근한 방식으로, 의식은 우리를 매혹적으로 만들고, 우리가 매혹을 느끼게 만든다.

또한 삶이 우리를 어느 곳으로 이끌더라도 죽기 살기로 헤쳐 나가게 만든다....

사람의 위대한 목적은 감각이다.

설령 고통 속이라 할지라도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말한 것이다.

더 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것,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 우리가 자신과 자식을 위해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하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으로서

우리에게는 간직해야 할 특별한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 종은 문화적 적응으로 지구 생태계를 철저히 교란하고 있는 특이한 종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두발보행 영장류는 지구가 지금까지 누려왔던 종 다양성을 해치는 최대 적으로 진화사에 기록될 위치에 처해 있다.


자연 선택은 지극히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여 특정 불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지적 설계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설계자 자신이 특정 불가능성 수준이 높은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 선택은 원시적 단순성이라는 낮은 곳에서 꾸준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산의 완만한 비탈들을 열심히 오른다...

다윈주의의 가장 불행한 오해를 하나만 꼽으라면, 그 이론이 우연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자연 선택이 무작위적인 확률의 이론이라면 그것은 옳을 수 없을 것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몸을 만드는 암호문의 무작위적인 변이들의 무작위적이지 않는 생존이다.


"자연선택은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온 세상의 모든 변이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조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쁜 변이를 솎아내고 좋은 변이를 보존하여 더하여간다.

자연 선택은 이렇듯 유기적. 비유기적 생명 조건과 관련하여

각 생물을 개선하는 일을 언제 어디서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주 조용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행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서, 혹은 아주 오랫 동안 존속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회에서, 결코 종교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류가 인류가 자연의 물질적 비밀을 풀기를 원하는 한 종교도 과학을 대신할 수 없다.


종교가 거의 모든 문화와 대다수 개인들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상적인 교류를 하면서, 세속적인 해법이 딱히 없어 보이는 일련의 피할 수 없는 실존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일상적인 인지능력들을 특수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죽음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인지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디서나 죽음을 지각한다.

하지만 물리적 죽음은 생물들이 피하도록 진화해 온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일종의 장기적 해결책을 추구한다.


신은 공공복지를 감독하고, 배반자와 기피자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생명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덕은 멋대로 굴러간다고 믿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과학이 우리에게 도덕 원리를 제공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도 마찬가지다.

도덕성의 이해는 비종교적인 도덕 추론을  통해 구해야 하고, 초자연적인 신성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사실들 속에서 찾아야 한다.


도덕이 종교에서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 이것은 실제로는 두 가지 질문이다.

하나는 우리의 양심과 도덕 감각이 어디서 오느냐다. 또 하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도덕 원리들이 우리의 도덕 감각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단지 신경 생물학적 구조에서 비롯된 허구적 산물일 뿐인가, 아니면 실재의 객관적인 일부로 간주될 수 있는가....

때때로 한 유전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일은 한 인간의 뇌에 이기적이지 않은 동기-진심에서 우러나온 무조건적이고 깊이 뿌리박힌 이타심-를 심는 것이다.


동정심과 신뢰는 호의를 계속 이어가게 만든다.

감사와 충성심은 호의에 보답하게 만든다.

최책감과 바그러움은 타인을 해치치 않고 호의에 꼭 보답하게 만든다.

분노와 경멸은 사기꾼들을 피하거나 처벌하게 한다.


우리의 도덕적 감각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무로부터 조제해낸 것이라기보다는 윤리의 내재적 논리와 맞물려 진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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