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소로로 평가받는 하인리히의 책을 읽었다.
내가 바라는 삶을 즐기는 그의 모습이 부러울 따름이다.
나도 언제가는 그렇게 살거라는 희망을 품으며 책속에 적힌 그의 감성들을 음미했다.
새 이름과 나무 이름이 많이 나오는 데 이 부분은 힘들었다.
이 숲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애덤스 가 사람들이 살던 곳이기 때문에 아직도 내겐 생동감이 넘치는 곳처럼 느껴진다.
이 농장의 흔적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소들을 몰고 가고, 낚시를 하고, 옥수수 밭을 일구는 소년들이 보이는 듯하다.
그 속에 내 친구 플로이드가 있고 내 모습도 보인다.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개의치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우르릉대는 천둥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고, 밤이면 빗방울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이불 아래서 번쩍이는 번개를 보는 것도 좋았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순간에도 숲 속 생명들은 진화론적인 이론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금방 다가올 겨울을 맞기 전에 에드워드 애비가 말하는 '찰나의 영원함'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ㅣ
농학자였던 아서영은 1878년 <여행>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자에게 거친 돌만 가득한 곳을 물려주라. 그러면 그는 그것을 정원으로 바꿀 것이다.
남자에게 정원을 9년 동안 빌려주라. 그러면 그것을 사막으로 바꿔버릴 것이다....
남자는 내 것이란 의식이 생기면 모래를 금으로 바꿔버린다.."
도시에서 물을 사용한다는 것은 꼭지를 틀고 잠그는데 몇 초 동안의 시간을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여기서는 물을 얻으려면 오두막에서 90미터 아래에 위치한 솦 속 저지대에 있는 우물까지 가야 한다.
어쩌면 자노비가 말했던 인간의 움직이는 본능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뿌리 깊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진화는 특정 개개인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인구 전체에서는 진행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유전은 개별적인 것에 상관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고 나면 인공적인 가상의 세계가 그에게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을까?
오래전 이곳에서 보냈던 오후는 내게 현실 세계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었고, 그 믿음은 아직도 굳건하게 남아있다.
나는 지금 정말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지나가버린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그러나 나는 그것을 살아냈기에 만족할 따름이다.
만일 내가 죽지 않고 계속 살 수 있다면 내 삶이 얼마나 더 행복할지 궁금하다.
정부는 늑대, 마운틴 라이언, 독수리 들을 멸종 위기에 처할 때까지 없애버렸다.
그리고 이젠 이 동물들을 다시 복원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어쩌면 그것들을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최고의 즐거움이란 책상에 앉아 그 앞의 창문을 통해 마운트 볼드를 바라보며,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혹은 노트에 펜으로 끼적거리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어젯밤에 가을 경치를 마지막으로 감상하기 위해서 전망대로 쓰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하늘은 흐릿한 회색빛이었지만 공기는 맑고 깨끗해서 언던들과 80킬로미터 너머에 있는 산 꼭대기까지도 잘 보였다....
나는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매료되었고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주변의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잠길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아주 가까우면서도 영원한 느낌으로 포개지는 것 같았고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마치 큰까마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호기심을 느낀다. 누구나 호기심에 따라서 행동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들에 한해서만 그런 호기심을 느낄 수 있게 제한된 삶을 산다.
진화는 무엇인가를 '덤'으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데는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에 놀라워할 줄 아는 인간의 특별한 능력은 한때는 보는 능력에 의존해서 생존하고 재생산해야 했던 데서 왔을 것이다.
통증이란 우리 자신에게 어떤 손상을 피하도록 해주는 경고 시스템 같은 것으로, 경험에서 나온다.
인간처럼 아주 복합적인 생명체에게 의식이란 적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늘이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면 일부러 아픈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 못을 찔러보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는' 새나 포유동물은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 갖추고 있는 본능적인 반응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모든 게 순조롭다가도 누군가 진짜로 계획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계획을 가지지 못한 쪽이 불리해진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전에 그 결과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의식이고,
그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진화에 있어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랑은 그저 부가적인 것이 뿐, 발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숲에서의 삶에 더 의존할수록 나는 숲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숲에 의존해왔는데, 심지어 이제는 바람에 날리는 사마라를 보는 즐거움조차도 솦에 의존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꼭 무엇을 잃어버렸는데 다시는 찾을 수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살짝 슬퍼졌으나 동시에 향기를 맡자 행복한 느낌도 들었다.
기억이 슾픈 감정을 불러일으켰지만 또 다른 추억이 기분을 나아지게 한 것이다.
우리가 의식을 갖게된다는 것이 '저주스러운' 이유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삶 전체를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삶의 과정을 알게 되면 각각의 죽음은 덜 외롭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항상 다른 것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대부분의 보상은 의도하지 않는 데서 얻게 된다.
가능성과 실상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
배아 한 개를 놓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기는 어렵다.
배아 한 개의 상대적인 가치는 99,999,999개의 배아가 죽어야만 성체가 되는 자작나무라는 식물의 가치에 비하면 아주 낮다.
한쳔으로는 이런 성숙한 개체를 생산해내는 진화의 복잡한 특징을 보노라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자연은 불필요한 것들은 혐오하지만 때로는 낭비처럼 보이는 생산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는 세상은 계획된 체계라기보다는 혼돈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기분이 들뜨고 즐겁고 낙천적이게도니다.
민주적 자유주의 사상가 토크빌은 '기회는 사전에 준비되지 않은 것에는 찾아오지 않는다'라고 했다.
아마도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곳을 꿈꾸며 이곳에 올 준비를 해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처 내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자라면서'부터 나는 지속적으로 점점 더 많은 책임감과 여러 가지 계획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것들을 다 해내기 위해서 계속 속도를 내다 보니 추월차선에 이르게 되었다.
주변의 경치는 그냥 흐릿한 형체가 되어버렸고 잠시 후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주변 경치를 보고는 있지만 그것은 예전의 경험으로 단서들을 알아보기 때문일 뿐이지 진정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아마 삶이란 테이프 플레이어를 빨리 돌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리를 들었어도 음악을 듣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올 한 해동안 나는 매일 산을 바라보면서 지냈다. 몇 시간씩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냈다. 아마 몇 주 동안.
하지만 그런 시간이 전혀 낭비로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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