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를 조작해 새로운 생명을 만들 수 있는 신의 영역에 도달한 인간.

주어진 신의 능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윈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라고.


빅뱅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물질과 에너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우주의 이런 근본적인 특징을 다루는 이야기를 우리는 물리학이라고 부른다.

물질과 에너지는 등장한지 30만 년 후에 원자라 불리는 복잡한 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원자는 모여서 분자가 되었다. 원자, 분자 및 그 상호작용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는 화학이라고 부른다.


인간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는 '호모 속에 속하는 동물'이고, 호모 속에는 사피엔스 외에도 여타의 종이 많이 존재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


인지혁명이란 약 7만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했을까? 우리는 잘 모른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뉴질랜드의 대형동물군은 인류가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뉴질랜드의 첫 사피엔스 정착자인 마오리족이 그 섬에 도달한 것은 약 8백년 전이었다.

그로부터 2백 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곳의 대형동물 대부분이 멸종했고 모든 조류 종의 60퍼센트도 멸종했다....

만일 호주의 멸종이 고립된 사건이었다면, 우리는 인류에게 의문의 여지라는 기회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은 인류를 생태계의 연쇄살인범으로 보이게끔 만든다.


수렵채집인의 확산과 함께 벌어졌던 멸종의 제1의 물결 다음에는 농부들의 확산과 함께 벌어졌던 멸종의 제2 물결이 왔고,

이 사싫은 오늘날 산업활동이 일으키고 있는 멸종의 제3 물결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는 급진적인 환경보호운동가들의 말은 밎지 마라.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생물들을 아울러 가장 많은 동물과 식물들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생물학의 연대기에서 단연코 가장 치명적인 종이라는 불명예를 갖고 있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이라는 우리의 관념은 생물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서 온 것이다.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난다는 것,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역사가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런 이익을 측벙할 객관적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에 따라 무엇이 선인지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단할 객관적인 척도는 우리에게 없다.

물론 늘 승자는 자기네 정의가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왜 승자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일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처럼 보고 있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개별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약해서, 대개는 역사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역사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이 있는 드넓은 지평을 갖고 있으며, 그중 많은 가능성들은 영영 실현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자유시장 신봉주의자는 산타클로스가 존재한다는 믿음만큼이나 순진한 것이다.

모든 정치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시장같은 것은 원래 없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경제적 자원은 미래에 대한 믿음인데, 이 자원은 도둑들과 사기꾼들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다...

시장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기, 도둑질,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속임수를 제재하는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할 경찰, 법원, 교도소를 설립하고 지원함으로써 신뢰를 보장하는 것은 정치체제가 할 일이다.


2014년의 경제적 파이는 1500년보다 크지만, 분배는 너무나 불공평해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아프리카의 농부와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집에 가져오는 식량은 5백년 전보다 더 적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의 성장은 거대한 사기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전구, 휴대전화, 카메라, 식기세척기...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문제가 생겼다. 누가 이 모든 물건을 구매할 것인가?...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누군가 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조업자와 투자자는 함께 파산할 것이다.

이런 파국을 막으면서 업계에서 생산하는 신제품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항상 구매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윤리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비지상주의다....

소비지상주의는 점점 더 많은 재화와 용역을 소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 자신에게 잔치를 베풀어 실컷 먹게 하고, 자신을 망치고, 나아가 스스로 죽이게끔 한다.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비만은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 다이어트 제품을 산다.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극히 조심스럽게 관리하는 데 반해, 그만큼 잘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는 자동차와 TV를 산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 계율이 새겨져 있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조그만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나 자녀, 친한 친구를 잃는 데 따르는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신체 내부의 쾌락적인 감각이다.

방금 복권에 당첨되거나 새로운 연인을 찾아서 기뼈 날뛰는 사람은 실제로 돈이나 연인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혈관속을 요동치며 흐르는 다양한 호르몬과 뇌의 여러 부위에서 오가는 전기신호의 폭풍에 반응하는 것이다.

지상에 낙원을 창조하려는 흐망을 가진 모든 이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의 내부 생화학 시스템은 행복 수준을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듯하다.

자연선택은 보통 말하는 의미의 행복을 선호하지 않는다.

행복한 은둔자의 유전적 계통은 끊어질 테지만, 걱정을 많이 하는 부모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계속 전해질 것이다.

진화에서 행복과 불행이 맡는 역할은 생존과 번식을 부추기거나 그만두게 하는 것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다....

진화는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몰려오는 쾌락적 감각을 누릴 수 있게 했지만, 그런 느낌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조만간 이 느낌은 가라 앉고, 불쾌한 느낌에게 자리를 내준다.


펜트하우스 최상층이 진흙 오두막보다 훨씬 더 안락하다는 사실은 뇌에 아무런 차이를 일으키지 않는다.

뇌가 오로지 아는 것은 현재 세로토닌 수치가 10이라는 사실뿐이다.

따라서 기업가는 자신의 태고조의 태고조 할아버지인 중세의 가난한 농부보다 조금도 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원리는 개인의 사람에서만이 아니라 거대한 집단적 사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것없는 즐거움을 느기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고나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을 미친듯이 쾌락을 찾아 해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이 사람은 날이면 말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