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몸은 하나밖에 없으며, 이 몸에 깃든 정신도 하나고.

이런 이유로 나는 우주에 유일한 존재이며 나의 정체성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자신에 대한 인지없이 몇 만년을 산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것인가?

그렇기에 우리 인간의 존재는 우리 스스로에게 중요하다.

우리의 수명 생존의 과정, 노화는 자연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진화의 결과물이며,

우리가 인위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장수와 수명 연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현재에 만족하고 행복을 추구하는데 만족할 만하다.


죽음을 잊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나, 잊힘을 사유하는 것은 노년의 숙명이다.


세대시간이 짧으면 진화의 수레바퀴가 더 빨리 돌아서 진화가 빨라지는데, 세균이 항생제같은 새로운 걸림돌에 그토록 빨리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세포의 장점은 생물의 기존 세포가 손상되거나 닳거나 감염되었을 때 새 세포로 교체하여 스스로를 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화된 면역 세포는 병원체를 식별하고 에워싸고 파괴함으로써 감염에 맞서 싸운다.


노화는 생애 주기에 걸쳐 생물학적 기능이 저하하는 것을 일컫는다. 노화는 장수를 제약한다.


식물에게 암이 치명적이지 않은 한 가지 이유는 식물의 세포가 상자처럼 생긴 세포벽에 갇혀 있어서 동물의 세포처럼 몸 곳곳으로 퍼질 수 없기 때문이다.


느리게 자라서 목질부가 단단한 나무는 사망률이 낮고 장수하는 반면 버드나무나 자작나무처럼 뻘리 자라는 나무는 수십년만 지나면 시들어 죽는다.


식물과 산호를 비롯한 모든 생물에서 수명은 생장이라는 방안, 번식이라는 방안, 보수라는 방안 사이의 융통성 있는 타협을 통해 결정되는 듯하다.


노화의 진화는 자연선택의 궁극적 관심사가 번식 성공임을 보여준다.


노화가 단일 현상이라면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지만, 노화는 단일한 현상이 아니다.

여러 체계의 전반적인 부전이다.


생명 연장의 첫 단계는 단세포생물들이 세포의 연합을 형성하여 자가 대체와 수리를 할 수 있는 다세포생물이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생물이 짧은 수명 때문에 번민할 수 있게 된 것은 구조가 복잡해지고 오래 살게 된 뒤였다.


'내'가 없다면 죽음이 있을 수 있을까? 무성생식하는 생물에게는 죽음이 없다.

하나의 단세포생물이 둘로 분열하면 둘 중 어느 것이 '나'인가?

'나'는 분열의 순간 소멸하는가? 아니, 애초에 소멸할 '내'가 존재했던가?

어느 영화에서 처럼, 즉음을 극복하기 위해 뇌의 정보를 데이터베에스에 전송하는 것은 일종의 무성생식이 아닐까?

동일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 두 곳에 전송하면 어느 쪽이 '나'일끼?

내가 '나'이면서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를 포기하고 영생을 얻는 파우스트적 계약을 맺을 사람이 있을까?


자연은 복잡하다. 자연선택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최선의 설계에 따라 단 번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길 때마다 땜질한 자리를 덕지덕지 달고서 진화한다.

이 책의 미덕은 노화를 진화의 관점에서 보도록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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