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함을 강조한 부분이 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이 보는 식물과 식물이 보는 인간의 관점에 따라 생각의 차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인간우월주의는 인간이 가진 오만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요즘에 나오는 책을 보면 기존의 사고를 뛰어 넘는 관점의 전환이 발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장담컨대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잘 생각할 수 없습니다.

책은 생각하는 데 가장 필요한 도구입니다.

책을,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에 접하고 생각을 자극받고,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게 되지요.

그래서 논리훈련이다, 사유 훈련이다 하는 것은 독서 교육과 떼놓을 수가 없는데 소설도 그렇습니다.

소설에도 질문이 있고 주제가 있지요.

소설은 직접적으로 노리적이거나 분석적인 질문을 던지지는 않지만,

다 읽고 나면 그 소설이 다루고 있는 큰 질문들이 떠오르고 독자는 그 질문들을 놓고 생각하게 됩니다.


언어의 마술을 경험하게 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무엇인가? 문학 작품을 읽히는 것입니다.

시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고 끊입없이 새로운 표현을 세상에 던짐으로서 우리가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고

우리의 경험에 새로운 요소를 부여해주는 작업, 이것이 문학이 하는 일이죠.


책을 읽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회가 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어려운 사회죠. 지금 우리가 그런 사회입니다.

생각을 못하는 사회는 절대로 민주주의를 할 수 없고,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사회도 만들지 못합니다.


한국은 그래서 공청회라는 것이 안 되는 사회이지요.

공청회는 공익적인 사안을 놓고 토론하는 곳인데 각종 이권 단체들이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난장판을 만들어버립니다. 

공익적인 사안을 놓고 토론하는 마당이 불가능한 사회면 그건 이미 희망이 없는 사회죠.


인간의 언어에는 네 가지 범주가 았는데 말하기, 읽기, 듣기, 그리고 쓰기입니다.

그런데 말하기는 쓰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나를 드러내 보이는 행위입니다.

듣기와 읽기는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행위이죠.


나는 많은 정보와 사실을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열한 것이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보와 사실이 많고, 그것이 정확해야 되고, 그 배열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되는 것이죠.


문장은 짧고 정확해야 한다. 수다스러우면 절대 안된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을 자기의 안목으로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인간이나 풍경이나 사태를 자기 나름대로 들여다보는 시선의 독자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인간의 삶을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조건이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절박감이나 열정이 있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되는 것 같아요.


일과 관심 영역에 해당하는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자료를 모으시고, 또 그 과정에서 새로운 주제나 할 일을 발견하면 관련 자료들을 다시 모으는 작업을 하시는군요.

그리고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현실인식을 심화시켜 나가시고.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안다'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안다'에서 변해 '아름답다'가 된거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난다.

그래서 이렇게 단계를 거쳐 '아는만큼 보인다'에서 '알게 되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된다' 이렇게 진화를.....


5월이었는데 꿀벌이 윙윙거리는 사과나무 옆에서 씨감자를 심고 있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사람들은 자기가 정원에 뿌릴 씨앗을 선택하고 식물을 가구고 하는 것에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식물 입장에서 보면 그 일을 하고 있는 인간이나 또 자신의 꽃가루를 옮겨주는 꿀벌이나 그 역할이 다를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답니다.....

우리가 오만하게 모든 일의 수행 주체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각 종을 평등하게 바라봤을 때 전혀 다른 작동 원리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것, 이것이 글쓰기, 특히 문학적 글쓰기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 그토록 말하고 싶어하는 것일가요?

무엇인가의 '결핍'과 무엇인가에 대한'사랑'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타인과 완전히 공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는 뜻이며, 우리 자신도 다 이해하지 못할 만큼 복잡미묘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최고의 글쓰기 재료입니다.


기억이 남다르다고해도, 메모를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뛰어난 작가는 물론이고 예술가, 심지어 기업의 ceo들도 메모를 자주 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메모광입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처음에 가려던 지점이 아닌 어뚱한 곳에 도착하는 것인데, 소설가의 운명도 그런 것 같아요.

이전에 이미 써놓은 소설이 다음 소설을 규정하고 그 운명을 간섭하기 때문에 작가 개인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있습니다.

살아온 인생이 앞으로의 인생을 규정하는 것처럼 이미 써놓은 소설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그 다음 소설들을 규정하기 때문에 결국은 작가로서는 제가 이미

써놓은 것들과 맞서면서 지금까지 흘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니 모리슨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서가를 둘러보고 거기에 없는 책을 쓴다."

또 어떤 작가는 "나는 내가 일고 싶은 책을 쓴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읽고 싶거나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뜻이죠....

많은 책을 읽어 보고, 중요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죠.

지금까지 내가 정말 알고 싶었거나 답변을 듣고 싶었지만, 지금껏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내가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기 위해서 작가는 늘 서가를 둘러보고 그 안에 넣고 싶은 책을 쓰는거라고 말할 수 있죠.

적어도 작가로서 그런 야심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런 거예요.

낯선 곳에 엉뚱하게 던져진 존재라는 것.

그러니까 자기도 발 모르는 낯선 곳에 엉뚱하게 던져져서 여기가 어디인지 어리둥절해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생각이에요.


또 한 가지는 운명적 인간에 대한 겁니다.

오이디푸스 이래로 계속 얘기되는 것인데, 인간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향해서 발버둥치다가 마침내 그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존재라는 거죠.


인간을 믿는 사람들, 인간을 믿는 휴머니즘, 도는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역사의 악행들을 돌아보면,

저는 인간에게는 아주 굳건하고 경건한 허무주의가 필요하고, 그런 이들의 가장 좋은 벗이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소설과 함께 세계의 무의미를 견디고, 동시에 휴머니스트들이나 광신자들이 저지르는 독선과 아집, 공격성 등을 견딜 수 있다고 믿거든요.

그런 면에서 하루의 삶을 저는 사실, 제가 10년 전에 그러려고 마음먹었던 것보다는 훨씬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책을 읽지요.


피카소에게 누가 물었대요.

"젊어서 성공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피카소는, "아주 좋은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내가 인정받을 수 없을까를 고민할 필요 없이 자기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상이 저에게 준 좋은 영향이 있다고 봐요.


김훈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개> <강산무진><남한산성><내가 읽은 책과 세상><선택과 옹호><자전거 여행>

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마이클 폴란 <욕망하는 식물>

강판권 <나무 열전>

신영복 <강의>

김훈 <빛의 제국><겨울에 대한 명상><호출><오빠가 돌아왔다><나는 나를파괴할 권리가 있다><아랑은 왜><검은 꽃><빛의 제국><포스트 잇><랄랄라 하우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