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유응부인가 김문기인가

율곡 이이는 실제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나

이순신과 원균, 누가 진정한 구국의 명장인가

이 책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이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결론부터 정리하자면, 사육신은 유응부가 맞고, 율록 이이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한 적이 없으며, 당연히 이순신이 구국의 명장이다.

권력이나 정치적 이해득실 혹은 무지한 소치등에 의거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인간들을 우리들은 항상 경계하고 엄중히 배척해야한다.

밑줄치며 읽은 내용들은 적어 본다.

 

세상은 본래 치세보다는 난세가 많고, 인간은 진리를 믿기보다는 사술에 현혹되기 쉬운 듯하다.

우리나라 근세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명저 [열하일기]의 [호질문]에서 범의 입을 빌려 "의원과 무당이 사기 잡술로 인명을 살상하는 범죄보다도

천박고루한 문사가 함부로 붓대를 놀려 과거 인물의 시비와 선악을 비평 왜곡하여 저승에 있는 당사자의 혼령을 통곡하게 하는, 그들의 무자비한 잔혹성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이라"라고 인간사회의 허위 잔인성을 꾸짖었다.

 

조선 왕조의 4대 군주인 세종대왕은 문치와 무공을 다 성공시켜 조선 왕조의 극성시대를 이루었다.

세종이 재위 32년(1450)만에 승하하고 세자인 문종이 즉위하여 부왕의 유업을 계승했으나, 불행히 재위 2년 3개월만에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정에는 일말의 불안한 공기가 감돌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1453)에 이른바 '계유정란'을 일으켜 단종의 심복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추강 남효온이 쓴 [육신전]은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사실을 순차적으로 기재했다.

 

[세조 실록]은 "노산군(단종}이 목매어 죽으니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으나 [현종 실록]에서는 "단종이 살해당한 후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는데,

영월군의 군리 엄홍도가 수습해 장사지냈다"면서 그 절의를 칭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육신이라는 명칭이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유성원의 순으로 왕조실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인종 원년(1545) 4월 9일 신축조에 시강관 한주가 조강에서

아뢴 기사에서다.

"성삼문.하위지.박팽년.유응부.이개.유성원등이 난을 꾀하다가 주살되었습니다.

대개 충의의 인사는 이러한 때에 많이 나오게 되니, 저 육신은 그때는 대죄를 입어 마땅하나 그 본심을 논하면 옛 임금을 위한 것입니다."

 

남효온의 [육신전]을 위시하여 [인종 실록]의 기사등 어느 기록에서도 김문기를 포함해 사육신이라고 지적한 문헌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김문기의 후손들이 편찬한 [백촌유사]에도 김문기를 사육신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곧 "국문에 임할 때 선생[김문기]이 '나와 육신은 모의 역시 같이 했고 의 역시 같은데 어찌 다시 묻느냐'고 하고는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어 답하지 않았다.

 

[논어]에 제자 중유가 정치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을 묻는 말에 공자는 반드시 명분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지시하면서

"명분이 바로 서지 못하면(명분이 실상에 맞지 않으면) 언론이 순리하지 못하고 언론이 순리하지 못하면 사업이 성취되지 못하고, 사업이 성취되지 못하면

문화가 향상되지 못하고, 문화가 향상되지 못하면 형벌이 적중(법대로 시행함)하지 못하고,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면 국민이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 무질서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강조했다.

 

근세 중국의 계몽사학자 양계는 명저 [중국역사연구법]의 <보편>에서 역사가의 구비요건을 史德.史學.史識.史才의 사장으로 설명했다.

양계초는 당나라 때의 유지기는 재.학.식.의 삼장만 말했지만 청나라의 장학성이 삼장에 사덕을 첨가했다고 설명하면서 양계초 자신도

장학성의 '사장'학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다만 장학성이 사재.사학.사식.사덕 순으로 배정한 것을 사덕.사학.사식.사재로 고쳐 사덕을 첫머리에 배정했다.

양계초는 '재'는 역사를 저작하는 문장력을, '학'은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론을, '식'은 역사를 통찰하는 관찰력인 '사관'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장학성은 '사덕'에서 '덕'은 저작자의 심술을 일컫은 것이라며, 역사가는 먼저 심술이 공정해야만 권세에 아첨하여 사실을 왜곡한 더러운 역사인 '예사'나 남을

비방할 목적으로 쓰는 '방서'라는 비평을 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이 기사(십만 양병설)가 [율곡연보]를 그대로 인용 기술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한국사대관]의 기사는 김장생(1548~1631)이 찬술한 [율록행장]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여 옮겨 적은 것이고,

[한국사] <근세전기편>의 기사는 [율곡전서]에 수록된 <율곡연보>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지인이나 제자가 쓰기 마련인 행장이나 연보는 주인공의 사적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철저한 사료 검증 후 인용하는 것이 기본 원칙인데,

개인의 행장과 연보를 그대로 인용하여 국사개설서에 기재하고 아무런 비판 없이 그 제자들에 의해 그대로 다른 저작물에 옮겨서 현재 통설이 된 실정이다.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어대니

제 능력 모르고 덤비는 것이 우습기만 하다 

당나라 문호 한유의 [조장적시]의 일부인데, 용렬하고 우매한 사람이 자기보다 월등하게 나은 사람을 비난하고 비평하는 행위를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말한 우리 사회의 어떤 인사들이란 [인물한국사].[인물한국사5]를 쓴 이모씨와 [원균 그리고 원균]이라는 소설을 쓴 고모씨를 지칭한다.

 

이순신이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시기는 선조 24년(1591) 2월로 이듬해 선조 25년(1592) 4월에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하기 1년 2개월 전이었다.

그는 수영에 부임하자 왜적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거북선을 비롯한 모든 전구를 수리하거나 새로 만들어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5월 6일의 옥포양전투를 위시하여 7월 8일의 한산도대첩에 이르기까지 경상.전라의 연합함대를 통솔 지휘한 주장은 이순신이고,

원균은 다만 앞에서 함대를 인도하여 적군을 공격한 선봉장 구실을 했다. 그런데 이모씨는 연합부대의 주장은 원균이고 이순신은 일부 작전에서

원균의 지휘를 받아야 했고, 이때 원균이 주장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서열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선조 30년(1597) 정월 초10일에 적장 가등청정은 큰 바람과 비 속에 병선 1만여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서정포, 두모포, 즉도등 그전 진루를 수리하여

전쟁 준비를 했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의 시작이다.

 

이상의 기록(선조수정실록)을 검토해 보면 원균은 통제사가 된 후 적군을 진격한다는 허세만 과장했을 뿐 실상은 적군을 두려워하여 진격하지는 못했으며,

뒤따라 도원수 권율의 독촉을 견디지 못하여 전군을 거느리고 부산포까지 진출했으나 적군의 유인작전에 휘말려 싸움다운 사움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거제도 칠전량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아 전군이 패몰되는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정유년(1597) 7월에 원균의 패전으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방어세력인 한산도의 수군이 괴멸하자 적병은 예정대로 전진하여 작장 가등청정이 부산의 서생포에서

서쪽의 전라도로 들어와 남원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자 도원수(권율) 이하 제장들은 모두 소문만 듣고 피해 도망했다.

8월에 안음의 황석산성을 함락시키자 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는 사절했으며, 9월에 남원을 함락시키자 명나라 총병 양원은 달아나고 전라병사 이복남,

남원 부사 임현, 조방장 김경로, 고아양현감 이춘원, 명나라 장수 접반사 정기원 등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남원이 함락되자 전부 이북의 지방도 모두 뿔뿔이 헤어져 국사를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통제사로 임명받자마자 진주를 거쳐 보성에 이르러 정병 100여명을 얻고, 8월 18일에 회령포에 도착하여 경상우수사 배설이 가진 전선 8척을 수집했다...

이순신이 진도 벽파정 아래 명랑해협(울돌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전선 12척에 대포를 싣고 조수가 밀려오는 것을 이용하여 물흐르는 쪽을 공격하여

적선 30여척을 쳐부수고 적장 마다사를 잡아서 죽이자 군대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

이듬해 무술년(선조 31년, 1598) 2월에 이순신은 고금도로 진영을 옮겼는데, 이때 군졸이 이미 8천여명으로 늘었다.

그는 군량이 모자라는 것을 걱정해 '해로통행첩'을 만들어 연해에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대선은 쌀 3석, 중선은 쌀 2석, 소선은 쌀 1석을 바쳐야만 통행을 허가한다"라고 했다.그런데 모두 쌀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자유롭게 통행하는 것을 기뻐하여 쌀을 바치니 10일 동안에 군량 1만여섬을 얻게 되었다.

또 백성을 모집하여 동철을 싣고 와서대포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드니 모든 일이 잘 처리되었으며, 원근 지방에서 피난한 사람들이 모두 이순신에게 의지하여

집을 짓고 장사도 하면서 생업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해 7월에 왜적의 관백 풍신수길이 사망하자 조선에 있던 적장들은 모두 철귀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이순신은 명군 제독 유정과 도독 진린과 합세하여 순천에 있는 적장 소서행장을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기로 약속했으나, 유정은 행장이 보낸 총.검등의 현물을

받고는 왜적을 치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낼 계획이었다.....

11월 19일, 이날은 우리 수준이 퇴귀하는 왜적을 격멸하는 최후의 결전이 전개된 날이었다.

이순신이 명나라 제독 유정을 달래어 순천에서 적장 소서행장을 공격하게 하고 도독 진린과 함께 해구를 지키고 핍박하자 소서행장은 사천에 있는 심안돈오에게

구원을 청했다. 심안돈오가 해로로 와서 구원하자 이순신은 이를 공격하여 크게 부수고 적선 200여척을 불사르고 적병을 죽인 것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군을 남해의 경계(노량진)까지 추격하여 몸소 독전하다가 날아오는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

이로써 7년 동안의 임진왜란은 멸적구국한 이순신의 우명과 함께 종말을 맺게 되었다.

 

이순신이 성격이 강직하여 권세가에 아부하여 출세를 희망하지 않은 사실과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웠는데도 병사(이일)의 방해로 군직을 빼앗기고

백의종군한 사실을 모르거나 일부러 모른 체 하는 말이다.

 

적침 초기에 수많은 병기와 전선을 침몰시키고 군병을 흩어버리고 육지에 올라 도주하려 한 원균은 과연 적진에 돌진하는 용감한 장수이며.

적정을 세밀히 정찰한 후 침착하게 출동해 옥포해전과 한산도대첩에서 승리를 거두고 후일 원균이 패전한 후 다시 통제사로 기용되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300척의 적선을 맞아 싸워 노량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이 과연 보신책에 치중하여 퇴피만 일삼는 장수인가.

 

실제 이 옥포해전의 상황을 살펴 보면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본곳이 장수이지만 단지 전선 7척만 거느린 상황이기 때문에 앞에서 함대를 인도하여 적선을 공격하는

선봉자적 구실을 한 것에 불과했으나, 이순신은 평소 준비해둔 대소 전서 85척과 많은 관하 장령을 인솔하고 경상.전라 연합함대를 통솔 지휘한 주장이었다.

이런 사실은 비변사가 논공 보고에서 "이번 전첩의 공은 이순신이 주도했기 때문에 원균은 가자할 필요가 없다"라고 회답한 것이 증명한다.

따라서 이순신이 원균보다 높은 계급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일본의 으뜸가는 맹장인 가등청정이 허술하게 한 척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겠는가?...

그런데도 왜적의 간첩작전에 속아 넘어간 당시 조정에서는 '항명종적' 곧 왕명을 거역하고 적장을 놓아 보냈다는 죄명으로 이순신을 하옥시키고 원균을 대신 통제사로

임명했다. 이모씨의 논지는 그 당시 원균을 옹호하던 선조이하 정부 당국자들의 편향된 주장을 그대로 계승 대변하여 세인의 역사의식을 오도하려는 것이다.

 

실제 원균은 그 당시 체찰사 이원익이 지적했듯이 전진에서 돌격장수의 구실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데도 전군을 통솔하는 통제사의 중책을 맡겨서 결국

'절족복속'하는 실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은 선조 이하 당국자들이 이순신을 시기 배제하고 원균을 편신중용하여 '임진역장'하는 죄과를 범해

전군을 패몰시킨 패배를 초래한 결과다.

 

추강 남효온 <육신전>

양계초 <중국역사연구법>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유성룡 <징비록>

의병장 조경남 <난중잡록>

<이충무공전서>

박지원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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