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근본주의자들의 가장 커다란 착각 가운데 하나는 바로 민간기업들이 급박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게 하는데 필요한 인센티브를 시장이 언제나

제공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신념은 신의 존재 유무에 영향을 줄 수 없지만, 경제에 대한 신념은 경제와 사회 현실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글로벌 경제시스템이 몰락할 것이고 이를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믿는다면

이 믿음 때문에 현실은 그 생각대로 될 것이다.

 

자본주의 1 : 애덤 스미스와 해밀턴에서 레닌, 후버, 히틀러까지의 시기

자본주의 2 : 루스벨트와 케인스에서 닉슨과 카터까지의 시기

자본주의 3 : 대처, 레이건, 밀턴, 프리드먼에서 부시, 폴슨, 그린스펀까지의 시기

 

자본주의 1은 1776년부터 1920녀대까지 지속되었으며, 다음 장에서 자본주의 1.0, 1,1, 1,2, 1,3으로 설명하는 소규모의 변화를 겪었다.

자본주의 1에서는 경제와 정치가 거의 서로 상관없는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정치와 경제의 구분은 대공황 시대에 사회민주주의적. 케인즈적인 접근 방식인 자본주의 2의 단계가 시작되면서 끝났다.

자본주의 2의 시대에 경제는 실질적으로 정치의 한 분야가 되었는데, 1930년대 뉴딜과 함께 시작되어 케인스주의의 확산과 매우 성공적이었던 전후 황금기를 거쳐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사작되면서 막을 나렸다.

이 40년 동안 주요 이론가와 정치 지도자들은 시장이 잘못될 때가 많으며, 정부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불안정한 시장의 힘을 길들이고 통제해

경제를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처-레이건의 통화주의 반혁명에 해당하며, 이책에서 자본주의 3.3으로 표현된 부시 그린스펀의 시장근본주의에서 최고에 달했던 자본주의 3은 정반대의

접근법을 택했다. 경제를 정치의 한 분야로 다루지 않고 오히려 정치를 경제의 한 분야로 다루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은 정부는 언제나 비효율적이고 대체로 잘못된 경우가 많으므로 되도록 시장이 부패한 정치인들을 다스리고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1.0 : 1776년 미국 독립선언과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패배

자본주의 1.1 : 1820년 ~ 1849년

자본주의 1.2 : 1848~1849년 유럽 혁명의 해, 곡물법 폐지, 항해조례 ~ 1860년 후반 미국 남북 전쟁, 보불 전쟁

자본주의 1.3 : 1870년 ~ 1914년 미국의 대호황기 혹은 2차 산업혁명

자본주의 1.4 : 1917년 ~1932년 자본주의가 유례없는 몰락의 위기를 맞았던 붕괴의 시대

 

자본주의 2.0 : 1931년 ~1938년, 금본위제의 포기와 뉴딜 정책

자본주의 2.1 : 1939년 ~ 1945년, 정부주도의 군국주의

자본주의 2.2 : 1946년 ~ 1969년, 케인스식 황금기

자본주의 2.3 : 1970년 ~1980년, 인플레이션, 에너지 위기, 전 후 금 기반 통화 시스템의 붕괴

 

자본주의 3.0 : 1979년 ~1983년, 초기 통화주의와 노동조합의 대립

자본주의 3.1 : 1984년 ~ 1992년, 볼커, 그린스펀, 대처-레이건 호황기

자본주의 3.2 : 1992년 ~2000년, 대 안정기

자본주의 3.3 : 2001년 ~2008년, 그린스펀과 부시 대총령 체제의 시장근본주의 시기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이 어떤 지식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경제학자의 노예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권한을 가진 얼빠진 사람들은 몇 년 전에 쓰인 잡문에서 자신들의 광기를 뒷받침할 생각들을 뽑아낸다.

경제학자와 정치 철학자들의 생각은 그것이 옳을 때나 틀릴 때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영향을 미친다.

정말로 이세상은 얼마 안되는 소수에 의해서 움직인다. -케인스-

 

정치인들은 전쟁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지만 금융위기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 전형적인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착각이다.

이런 착각은 자본주의 4.0에서는 사라질 것이다.

 

왜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명백하게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택했을까?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은 신고전학파의 모델이 논리적으로 단순하고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리학을 부러워하면서 경제학자도 어려운 수학적인 학문으로 바꾸기를 바랐던 경제학자들에게는 이쪽이 더 매력적이었다.

 

1960년대부터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은 거시경제에는 적절한 학문적 토대가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은 시카고 대학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경제 모델에 정확한 '미시경제학적 기초'에 근거하지 않으면 과학적 학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여기에서 미시경제학적 기초란 기업, 소비자, 노동자, 투자자들의 행위와 기대가 모두 수학적으로 규명되는 것을 말한다.

 

만약 경제학 모델이 경제의 모든 행동 법칙에 대해 벙확하게 가정했다면 사람들이 세상의 다른 법칙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은 '업청나게 비합리적'인 것이다.

반면에 경제 행동에 대한 모델의 가정이 틀렸다면, 모델은 어쨌든 잘못되었고 고려할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유효하려면 모든 경제 모델은 합리적 기대가설을 따라야 했다.

 

합리적 기대의 경제학은 순환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즉 ,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정확한 모델이 존재하고 경제는 항상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케인스가 주장하는 식의 정부 개입은 결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론 사슬은 증명해야 할 것을 오히려 가정하고 있다.

마치 이 장 첫 부분의 우스갯소리에서 경제학자가 깡통따개가 있다고 가정하고 콩 통조림을 먹기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관행에 따르면 애덤스미스, 리카도, 케인스, 슘페터, 하이에크와 같은 위대한 경제학자들도 수학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경제학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

이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수학 공식이 아니라 말로 표현한 이유는 수학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둘 다 경제학으로 연구 분야를 바꾸기 전에 저명한 수학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수학은 그 성격상 경제의 복잡성, 모순, 애매모호함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케인스는 "정확하게 틀리는 것보다 대충 맞는 편이 낫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합리적 기대가설, 통화주의와 함께 이론 3총사 중 세 번째 그리고 아마 가장 악명 높은 이론은 '효율적' 시장 개념이었다.

효율적 시장 가설은 합리적 기대가설과 나란히 발전된 금융시장에 대한 가설이다.

효율적 시장 가설은 케인스학파가  주장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분석과 조언을 제공하려면 새로운 경제 사상은 세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시장경제는 균형 상태의 정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효율적인 정부와 역동적인 민간기업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협력적인 관계이다.

세번째 특징은 위의 두가지 특징의 원인이기도 하고 걀과이기도 한데, 바로 인간 행위와 경제적 사건들이 원래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일부 비즈니스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은 계속해서 대처-레이건 시대의 슬로건인, "시장을 거스를 수 없다", "번영으로 가는 길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시장은 항상 옳다"고 주장하겠지만, 이들의 외침은 이제 기계적이고 확신을 잃었다. 시카고 학파나 공화당원, 라디오 토크쇼나 보수적인 블로그에 남아 있는

자유시장 맹신자들은 와일 코요테나 매년 5월이면 붉은 광장을 행진하는 70년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과 같다.

이들의 신념은 변함없지만 세상은 변했다. 시장근본주의는 조지 소로스가 퇴조기라고 부른 시기에 접어 들었다.

오랫동안 부풀어온 방울들에서 바람이 새기 시작하면서 거품이 거의 꺼져가는 단계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게임을 믿지 않으면서도 게임을 계속하는' 시점이다.

 

"성과 중심의 현상 세계에서는 우리가 측정하는 것이 우리가 행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측정법을 적용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실제로는 삶의 질을 악화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는 실제로는 생산과 환경 보호 사이의 이율 배반적인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 성과를 더 정확하게 측정한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이 경제에도 이롭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제성과 사회진보를 어떻게 측정할 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만약 이런 것들을 측정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애초의 방식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