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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 지음)

음풍농월. 2021. 12. 4. 20:48

우리는 여러가지로 기획되고 조직화된 사회의 틀속에 있지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유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책이다.

 

인간 생존의 두 가지 양식, 즉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 양식'과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할 수 있는 '존재 양식'을 구별하고 있다...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소유 양식'이 자명한 전제가 되고 '존재 양식'을 능가하는 점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위기에서 벗아나기 위한 새로운 사회상과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인간 생존의 두 가지 양식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소유'는 현대 산업사회에 있어서 기본적인 생존양식이며,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기의 가치, 자기의 주체성, 혹은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익숙해졌다. 이러한 관계는 물건뿐 아니라 인간, 지식, 관념, 신, 나아가서는 건강이나 질명에 까지 미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존재'는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형식이나 태도가 아니라 유동하는 과정이며, 타자와의 관계에서는 주고, 나누어 갖고, 관심을 함께 가지는 살아 있는 관계가 된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소외된다. -칼 마르크스-

 

초인이 되면 될수록 자기 자신이 비인간적으로 된다는 사실에 우리는 각성해야만 한다.

 

일에 대한 집념을 윤리 규범으로서 받아들이면서 하루의 나머지 시간과 휴가 동안은 완전히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는 모순과 비슷하다. 한편에는 일관작업의 벨트 컨베이어와 관료제적인 일과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텔레비젼, 자동차, 섹스가 있어 이 모순된 조합을 가능케 하고 있다.

 

우리의 사회는 유별나게 불행한 사람들의 사회이다.

고독하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파괴적이며,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들, 그렇게 아끼려고 애쓰는 시간을 한편에서 낭비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존재와 실제는 '진정한, 시종일관한, 진실된 것'이라고 정의된다.

 

삶의 소유 양식에서는 세계와 나의 관계는 소유나 점유의 관계이며, 이 관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 모든 물건을 내 소유물로 만들고 싶어한다.

삶의 존재 양식에서는 우리는 존재의 두 가지 형태를 확인해야만 한다. 하나는 뒤 마르세의 말에 예시되어 있듯이 '소유'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살아 있는 것, 세계와 진정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또 하나의 형태는 '보이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존재의 어원에 예시되어 있듯이 사이비 외관과는 대조적으로 사람 혹은 물건의 진정한 본성, 진정한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존재양식에 있어서 신념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실제로 신념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메마르고 희망을 잃어버리며 자신이 존재의 핵심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존재양식에서의 신념은 우선 어떤 관념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내적 지향이며 태도이다.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사람이 산념 '속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지식은 도그마의 특질을 띠어서는 안된다.

도그마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소유양식에 속한다.

존재양식에 있어서는 지식은 사고의 통찰적 능동성-확실성을 찾아내기 위해 결코 멈추어 서는 일이 없는-일 뿐이다.

 

인간의 자유는 우리의 소유물, 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아에 얽매이는 정도에 따라 제약된다.

우리의 자아에 얽매임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저해하며 결실을 방해당하고 자기를 완전히 실현하는 일도 방해를 받는다.

 

삶의 소유양식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하는 여러 가지 '대상'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우리의 전반적 태도이다.

모든 것이 다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 재산, 의례, 선행, 지식, 사상 등이 모두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하느냐 보다도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야말로 실재이며 우리를 움직이는 정신이며 우리 행동을 몰아가는 성격이다.

대조적으로 우리의 동적인 핵심에서 유리된 행위나 의견은 실재성을 갖지 못한다.

 

사랑, 자랑, 미움, 기쁨은 언쯧 보기에 불변의 실체처럼 보이지만 이와 같은 명사에는 실재성이 없을 분더러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어떤 인간의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라는 통찰을 흐리게 할 뿐이다...

물건은 우리의 육체 조직 속에 어떤 감각을 일으키는 에너지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테이블이나 램프와 같은 물건은 본 대로 존재한다고 단순히 믿는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감각을 지각으로 변모시키게끔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상은 이런 지각을 통해 주위의 세계를 조작함으로써 주어진 문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이런 표상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 이름은 표상의 궁극적이고 불변하는 실재성을 보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유의 필요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살려는 욕망'이다.

우리가 행복하건 불행하건 간에 육체는 '불멸'을 행하여 노력하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경험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멸이라는 것을 믿게끔 하는 해결책을 찾는다. 이 소망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어 왔다.

 

존재양식에는 그 전제조거으로서 독립, 자유, 비판적 이성의 존재가 있다.

그 기본적 특징은 능동적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분주하다는 외면적 능동성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인간적인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내면적 능동성의 의미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나 재능을,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그 정도는 다르지만- 주어져 있는 풍부한 인간적 천부를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 성장하는 것, 넘쳐 나오는 것, 경청하는 것, 자아의 뇌옥을 초월하는 것, 관심을 갖는 것, 경청하는 것,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어느 것 하나 언어로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말은 경험을 채운 그릇이며 경험은 그릇에서 넘쳐 나온다.

언어는 경험을 가리키지만 경험은 아니다. 경험한 것을 사상과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 경험은 없어진다.

 

'존재'는 거짓된 환상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현실의 모습과 관련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의 영역을 증대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자기의, 타인의 그리고 우리 주위의 세계의 현실에 대한 통찰의 증대를 의미한다.... 존재에의 길은 표면을 꿰뚫고 현실을 통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입센은 그의 작품 <페르 귄트>에서 이 자기중심적 인물을 멋지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기 자신'의 일만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다.

그는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에 의해서 '자기'는 '욕망의 덩어리'이므로 '자기자신'이라고 믿고 있다.

임종에 이르러서 그는 자기의 소유중심의 생활 때문에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자기는 알먕이가 없는 양파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한 번도 자기 자신이 아니었던 미완성의 인간임을 시인한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으로부터 생기는 걱정과 불안은 '존재양식'에는 없다.

만일 '내가 존재하는 나'이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나의 안정감과 동일성의 감각을 빼앗거나 위협할 수 없다. 나의 중심은 내 속에 있다. 나의 '존재'능력과 스스로의 본질적인 힘을 표현하는 능력은 나의 성격구조의 일부이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나다. 이것은 정상적인 삶의 과정에 해당하는 것이며, 물론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병이나 고문, 그밖의 강력한 외적 제한이 가해지는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되는 어떤 것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존재는 실천에 의해 성장한다.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 지적 창조의 힘 등 모든 본질적인 힘이 표현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쓰여지는 것은 잃어버리지 않고 반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다.

존재에 있어서의 안정감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나 자신 속에 있다.

즉 생명과 자기의 생산적인 힘에 대한 신념의 결여 속에, 퇴보적 경향 속에, 내적 나태와 자진하여 다른 사람에게 내 생명을 양보하려고 하는 속에 그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 일단 숫자로 환원되어 버리면 진짜 관료는 철저히 잔인한 행동을 범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에 비례할만큼의 지독한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에세거 아무런 인간적인 유대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료는 사디스트보단 덜 지독하지만 더욱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부에는 양심과 의무의 갈등마저 없기 대문이다. 그들의 양심은 '실제로' 그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이입과 동정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은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에서의 도피>, <정신 분석과 종교>, <건전한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