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경험(유발 하라리 지음)
전쟁은 여러 가치가 모두 존재하는 영역이다.
참여한 개개인이 갖고 있는 상황, 생각, 가치와 더불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일시에 발생한다.
따라서 관점이란 것이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그 벌어진 일을 감당하지 못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한다.
상황에 따라서 무법 천지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든 행동은 본인 각자의 사고가 치밀하게 동작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모든 행동의 동기와 벌어진 일의 책임은 각 당사자에게 있음이 명확하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논지는 1740년부터 1865년 사이에 전쟁이 계시 경험이 되었다는 것이다.
18세기 이전에는 전투원들이 결코 전쟁을 계시 경험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계시'가 단지 지식을 얻는 방법을 의미하며, 종교와 근본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면 자신과 세상에 대해 문언가 심오한 것을 깨닫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권위를 획득하는가?"
지식 = 경험 x 감수성
계시란 지식을 얻는 특정한 방법이지 특정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보통 우리는 탐구와 관찰, 연구, 분석이라는 통제된 과정을 거쳐 새로운 종교적, 역사적 과학적, 개인적 지식을 얻는다.
이에 반해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외부의 힘이 새로운 지식을 우리이게 떠안길 때, 우리는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감각주의 철학자들은 유물론적 견해를 채택하길 꺼렸고, 비물질적인 용혼 혹은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았다....
정신의 모든 것은 감각이나 다른 어떤 것에서 유래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정신과 영혼을 육체에 종속시켰다.
샤를 보네는 자연을 창조한 신성한 창조주가"영혼의 행동을 용혼의 감수성에 종속시켰고, 영혼의 감수성을 (감각 기관의) 섬유의 동작에 종속시켰다.
섬유의 동작은 대상의 행동에 종속시켰다"고 설명했다.
보네에 따르면 정신적 관념은 근원적으로 대상이 감각의 섬유에 새긴 움직임에 불과하다. 본유관념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추상적이고 강장 영적인 관념도 자연적인 원천인 감각적인 관념에서 유래한다.
가령 우리의 모든 관념 중에서 가장 영적인 관념인 신도 분명히 우리의 감각에서 생긴 것이다.
습득된 관념과 타고난 느낌을 구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느낌이 지식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양심의 명령은 판단이 아니라 느낌이다.
우리의 모든 관념은 우리 밖에서 오지만, 그 관념을 평가하는 느낌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에게는 관념이 있기 전에 느낌이 있었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 무엇이든, 그 근원은 우리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 본성에 알맞은 느낌을 주었다.
적막을 깨는 것은 보초병들의 외침과 천으로 싸맨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뿐이었지.
그때 그 순간 내 모든 삶, 과거와 미래가 내 내면의 눈앞으로 빠르게 지나갔고, 내 마음은 다가오는 아침의 운명에 미래의 모든 일이 걸려 있음을 예감했네.
지난 200년 동안 전쟁 문화는 전쟁의 환상을 적나라하게 노출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알리거나 막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단순히 전쟁의 참상을 노출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와 상반되는 수많은 사례를 무시하는 성향이 있다.
위험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쟁의 위험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매력을 느낀다.
엄청나게 흥분해서 총알과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에게 돌진한다.
죽음을 모면하는 사람이 자신일지 아니면 다른 사람일지 모르는 채, 차가운 죽음을 향해 맹목적으로 덤벼든다.
야망의 갈증을 풀어줄 과일, 곧 승리의 황금빛 트로피가 앞에 놓여 있으니,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인간은 과도하게 강력한 감각 자극의 공격을 받으면, 무감각이라는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인간이 과도한 자극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감수성을 축소하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무서운 것을 숭고한 것으로 경험하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면, 내적인 정신이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실제 극심한 공포는 모든 정신의 자유를 넘어선다. 다라서 숭고한 대상은 분명 무서운 것이지만, 실제 공포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다.
공포는 고통과 폭력의 상태다.
우리는 오직 우리 내면의 움직임에 대한 느낌을 통해 어떤 것을 멀리 떨어져서 숙고할 때만 숭고한 것을 즐길 수 있다.
따라서 무서운 대상의 힘이 우리를 직접 겨냥하지는 않겠지만,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의 감각 본성은 압도당해도 우리 정신은 자유롭게 남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무서운 대상의 힘이 우리를 직접 겨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이때 필요한 인간 본성의 고양은 개인이 거의 이를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 위험에 빠져 적대적인 자연력의 객체가 되면 우리의 미학적인 판단이 멈추기 때문이다. -칸트-
실러는 바다의 폭풍이 안전한 해안가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숭고하지만,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숭고하지 않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엄청난 위험은 가장 심오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잠재적인 숭고한 경험이다.
다만 거리를 두고 현명하게 위험을 경험할 수 있는 '고양된 본성'을 미리 갖춘 인간에게만 해당한다.
인간 대다수는 엄청난 위험에 직면하면 오직 완화되지 않는 공포만을 느낀다.
엘제아르 블라즈는 "죽은 사람을 처음으로 보는 (....) 신병의 얼굴을 여러분이 보아야 한다.
이들은 시체를 스치는 것도 무서워 6미터를 넘는 길도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곧 점점 더 가까이 시체들에 다가가고, 나중에는 아무 생각없이 시체를 넘어 다닌다."고 기록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소장으로서 나는 사건 뒤에 흥분된 감정을 단 한번도 들키지 않도록 혹은 내면의 의심과 우울감이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나는 인간의 감정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슴이 찢어질 만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동안 냉정하고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내 안에서 인간이 깊은 감정이 솟아올라도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엄마들이 웃거나 보채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스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나는 냉정하게 서서 지켜보아야 했다....
엄마들은 정말 가슴이 미어지게 눈물을 훌렸다.
진심으로 그들이 가여운 마음에 땅속까지 움츠러드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아부 사소한 감정도 드러낼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그 모든 사건을 몇 시간이나 지켜보아야 했다....
내가 이 모든 일을 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것이다.
모두가 바라는 단 한 사람이 바로 나였고,
나는 명령과 지령을 내리는 유일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부하들이 명령을 수행하는 현장에도 기꺼이 함께 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회스-
회스의 회고록에서 당황스러운 점은 우리가 회스나 힘러를 '무감각한 짐승'으로 묵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무감각화의 논지는 큰 고통을 겪은 후 스스로 타인에게 큰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이렇게 해명한다.
그들이 겪은 고통이 그들을 무감각하게 만들었고, 그 후 자신들이 야기한 고통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회스의 사례는 이런 해명 논리를 부정한다.
회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자신이 하는 행위와 자기 내면의 감각과 감정을 충분히 인식한 상태에서 엄청난 고통을 야기하고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생생한 경험의 역사는 다분히 관심의 역사다.
인간에게는 매 순간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온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람들의 말과 행동, 자기의 말과 행동, 머리를 스치는 생각, 밀려오고 밀려가는 감정, 온몸에서 느껴지는 무수한 감각 등.
특정 순간 인간은 이렇게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작은 파편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이 무엇을 인식하는지, 곧 인간이 실제 무엇을 경험하는지는 그의 관심에 달려 있다.
자기 감각과 감정을 무시하고 외부 세계의 사건에 모든 관심을 집중할 수도 있고,
주변의 소리와 장면, 냄새 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할정도로 내적인 감각이나 감정 변화에 관심을 집중할 수도 있다.
관심의 초점은 어느 정도 문화적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문화는 서로 다른 현실의 조각에 초점을 맞추도록 그 구성원들을 '훈련'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