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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될 때(폴 칼라니티 지음)

음풍농월. 2017. 12. 20. 23:35

시간을 빠르게 보내기 위한 방법을 아는가?

몸이나 마음을 바쁘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외부의 조건에 의해서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없다.

저번 주부터 이번주 내내 그런 힘든 시간이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

시간은 빨리 가지만 괴롭다.


한 가지 위안거리가 있다.

주말에 읽은 책이 말한다.

의사들은 생명을 가지고 긴장된 순간을 순간 순간 살아가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보다는 가볍다고 말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의 삶이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살아있는 인간 모두는 나름의 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짐은 당사자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커 보인다.

어쨌든 시간은 간다. 어떻게든 일은 마무리 된다.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라


"최고가 되는 건 아주 쉬운 일이란다. 최고인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보다 1점만 더 받으면 돼."


여름이 지나갔다. 스탠퍼드는 다른 대학보다 한 달 늦게 학사 일정을 시작하기 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남겨두고 뿔불이 흩어졌다.

오후가 되면 나는 혼자 사막으로 들어가 낮잠을 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킹맨의 한적한 카페에서 일하는 여자 친구 에비게일이 퇴근할 때쯤 사막에서 빠져나왔다.


문학은 인간의 의미를 다채로운 이야기로 전하며, 뇌는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기관이다.


나는 무언가를 성취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더 끌리는 편이었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뇌의 규칙을 가장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은 신경과학이지만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문학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우리 자신이 고통받을 때 다른 사람의 명백한 고통에 얼마나 무감각해지는가에 주목했다.

조지프 콘래드는 잘못된 의사소통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특유의 명쾌한 감각을 통해 보여주었다.


대학 시절 내내,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는 금욕적이고 학구적인 내 연구는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를 쌓고 강화해나가려는 충동과 갈등을 일으키곤 했다.

반성하지 않는 삶이 살 가치가 없다면, 제대로 살지 않은 삶은 되돌아볼 가치가 있을까?


다시 말해, 나는 의미를 연구할 것인가 아니면 경험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거친 들판에 달빛이 흘러넘쳐 전등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거의 3000미터 높이의 봉우리에서 우리는 침낭 안에 들어가 서로 가까이 붙어 누워, 누군가가 사려 깊게 준비해온 커피를 마시며 차디찬 바람을 이겨냈다.

그런 다음 차분히 앉아서 동쪽 지평선이 밝아오며 하늘이 푸른빛으로 변하고 별들이 천천히 지워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어떤 철학자도 낮과 밤 사이의 이 광경만큼 자연의 숭고함을 잘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언어는 고작 몇 센티미터 두께의 두개골에 보호받는 우리의 뇌가 서로 교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단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삶의 의미와 미덕은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의 깊이와 관련이 있다.

인생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적 측면, 즉 '인간의 관계성'이다.


축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드러운 가을바람이 불어왔고, 내 생각은 제멋대로 흘러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원에서 들은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집어들고 읽으라."

하지만 내가 들은 목소리는 그와 정반대였다. "책은 치우고 의학을 공부하라."...

하지만 이 길은, 책에는 나오지 않는 답을 찾고 전혀 다른 종류의 숭고함을 발견하며, 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연민과 무감각 사이에서 그때그때 감정이 교차한다.


의과 대학원에 다니면서 나는 의미, 삶, 죽음 사이의 관계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엄청난 투쟁과 고통을 딛고 이 세상에 오지만, 세상을 떠나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스탠퍼드에서 영문학을, 케임브리지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며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놀랜드의 책을 비롯해 여러 기록들을 보니 죽음이란 직접 대면해야만 알 수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로 어제 병원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삶과 죽음은 그저 추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 들 모두를 바로 가까이에서 목격했다.

베케트의 포조가 한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삶은 너무나 짧은 '잠깐'이기에 충분히 고민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맡겨진 역할, 즉 겸자를 든 무덤파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시간과 방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


실제로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연봉, 근무 환경, 근무 시간을 고려하여 직업을 선택한다.

그러나 원하는 생활 방식에 중점을 두고 선택하는 건 직업이지, 소명이 아니다.


이런 큰 병을 만나면 가족은 하나로 똘똘 뭉치거나 분열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죠.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서로를 위해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해요.

아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침대 곁에서 밤을 새우거나 하루종일 병원에 있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아시겠죠?


이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가령 당신이나 당신의 어머니가 몇 달 더 연명하는 대가로 말을 못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앟고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서였다.

신경와과는 뇌와 의식마큼이나 삶과 죽음과도 연간된 아주 매력적인 분야였다.


커다란 그릇에 담긴 비극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주는 것이 최고다.

한 번에 그릇을 통째로 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는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의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다가 때로는 그 무게를 못이겨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수술실에서 시간이 재미있는 점은 정신없이 전속력으로 움직이든 차근차근 나아가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지루함이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는 것이라면, 수술은 그와 정반대이다.

고도로 집중하다 보니 시곗바늘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두 시간이 마치 일 분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바늘땀을 뜨고 상처를 치료하고 나면 갑자기 일상의 시간이 시작된다....

마지막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하루가 얼마나 길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실감나지 않는다.

병언에서 퇴근하기 전에 처리해야 하는 몇 가지 행정적인 일은 모루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내일로 미룰 수 있을까?

안 될 말이지.

한 숨이 나왔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기술적이 탁월함이 곧 도덕적 요건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 기술에 정말 많은 게 걸려 있거나, 불과 1~2밀리미터 차이로 비극과 성공이 갈릴 때에는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몇 년 전, 나는 다윈과 니체가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물을 구정짓는 특징은 생존을 향한 분투라는 것이다.

삶을 이와 다르게 설명하는 건 줄무늬 없는 호랑이를 그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수년을 죽음과 함께 보낸 후 나는 편안한 죽음이 반드시 최고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거야."


그리고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모든 사람이 유한성에 굴복한다.


2015년 3월 9일 월요일, 폴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병원 침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영원한 산의 정상에 오르리라. 그곳의 바람은 시원하고, 풍경은 장엄하리라.


<멋진 신세계>

T.S 엘리엇 <황무지>

토머스 브라운 <의사의 종교>

사뮈엘 베케트 <이름 붙일 수 없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