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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소본능(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음풍농월. 2017. 12. 9. 22:53

우리는 왜 고향을 그리워 하는가? 이에 대한 어느정도의 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생존의 안식처로서 갖는 고향, 대부분의 모든 동물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 소개되는 두루미, 벌, 사막 메뚜기, 진딧물, 연어, 거미, 벌거숭이두더지쥐, 나그네비둘기 등을 통해서 다양한 얘기가 펼쳐진다. 

제일 인상적인 부분은 연어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고향으로 찾아오는 주인공의 귀향이다.

연어의 희귀는 알에서 태어났을 때 맡은 냄새를 기억해서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먼 바다에서 자라나 알을 낳으려고 여행을 할 때 그 기억에 의지해 냄새가 강해지는 정도를 파악하여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고향으로 찾아오는 연어는 90프로 정도의 성공율을 갖고 나머지는 실패한다고 한다.

실패한 10프로는 유전적으로 실패한 것이가? 아니면 유전학의 배려인가?

모두가 성공하여 한 곳으로 찾아올 경우에 사고가 발생하면 그 연어의 멸종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사고란 댐이 생기거나 물길이 막히는 경우이다.

이런 사고가 발생해도 10프로의 실패한 연어는 다른 곳에 정착하여 산란을 하고 종을 번식을 이어간다.

도시에 나온지 30년이 넘은 나도 어느 시기에나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 고향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는 시간이였다.



버몬트대학교 교수직에서 퇴임한 나는 어린 시절의 구심점이었던 고향 메인주로 돌아가 살고 싶었다.

35년 전쯤 나는 고향집에 일렬로 나무를 심어두었다. 아름드리로 성장한 나무를 보면 거기에 얽힌 수많은 추억이 떠올랐다.


집은 수많은 동물의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처럼 생명을 가능케 하는 집에는 이를 소유하고 지키려는 욕구가 수반된다.

숨쉬는 공기, 그릇에 담긴 먹이와 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이 결핍된 우리에 동물을 가둘 때,

수많은 동물종에게 삶의 터전이나 다름없는 서식지를 파괴할 때조차 인간은 동물의 '집'에 대해 별 생각이 없다....

동물은 제 집을 지키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우기도 한다.


놀랍게도 동물에게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달리기 선수에 비유될 만큼 발이 빠른 것으로 얼려진 개미는 열기에 강한 내성을 보이도록 진화되어 왔다...

집으로 피신해 데워진 몸을 식히고 체액을 보충하지 않은 채로는 모래 위를 오랫동안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에서 개미의 귀소 능력은 중요해진다...

집을 정확히 찾아가려면 출발에 앞서 '지도'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한다.

사막개미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이는 현재 위치까지 제 발로 '걸어간' 경우에만 가능하다.


사막메뚜기의 경우 개체수 과밀은 신경계가 호르몬을 변화시켜 몸 색깔, 날개 길이, 행동 양식을 보이며 끊임없이 이주하도록

'선택적' 진화가 진행돼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극도로 예민해진 이주 메뚜기는 뛰어올라 위로 날아가는 무리를 따라갈 것이다.


삶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 가득차 있다.

하루살이의 유언을 듣기도 전에 인간이 소유한 지식은 세상의 기록창고에서 삭제될 것이다. - 장 앙리 파브르-


일부의 큰뒷부리도요는 솔로몬 제도와 뉴기니에 잠깐 들르겠지만 나머지는 한 번도 쉬지 않고 하루 평균 최대 1,500킬로미터까지 비행할 것이다.

이처럼 놀라운 비행 도중에 녀석들은 체지방 뿐만 아니라 근육과 기관을 수축시켜 얻은 단백질까지도 몽땅 써버리게 된다.

뇌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체 부분이 소진되는 셈이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비행 욕구만이 녀석들을 떠나게 하고 쉼 없이 날도록 만들 것이다....

인간에게는 감정이 논리에 의해 이차적으로 힘을 얻거나 증폭될 수 있을지 몰라도 동물의 행동은 우선적으로 감정에 따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연어는 어떤 물줄기를 선택할 것인가?"였고, 실험 결과 "90퍼센트 이상의 연어가 옳은 물줄기, 즉 18개월 전에 자기가 태어난

부화장에서부터 기억해왔던 화학물질 냄새가 나는 물줄기를 선택했다." 이로써 연어가 냄새를 기억한다는 결론이 분명해졌다.

녀석들은 자기가 자랄 때 경험한 냄새에 이끌렸던 것이다...


자연계에서 기적에 가가운 동물의 집 찾기를 가능케 해주는 완벽한 항법 메커니즘만큼 놀라운 것은 없다.

하지만 250년전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가 내놓은 명언대로 "차선의 적은 최선이다." 완벽함에는 그만큼 비용이 들게 마련이다.

즉 완벽함을 추구하기란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완벽해지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선택을 제한하는 불리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자연계에는 동물의 집 찾기를 비롯해 불가피하면서도 예상 밖의 변화에 직면하더라도 지속적인 미래에 유리하도록 유동성을 만들어내고

현재의 완벽성에서 벗어나도록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완벽한 메커니즘은 일반적으로 최고의 장기적 결과물을 얻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 자연과 볼테르는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변화가 현실인 이상, 현재의 완벽성에 갇히게 되면 당연히 참담한 결과로 이어진다.

게다가 완벽성은 대개 충분한 시간을 전제로 한다. 다양성은 미래의 변화에 직면해 선택권을 만들어내는 바연의 방식이다.

오랜 진화의 역사에서 성행위는 다양성을 창조하는 유전자풀을 얻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는 메커니즘으로 진화해왔다....

한 번에 1,000여개의 알을 낳는 연어의 새끼들 가운데 몇 마리가 산란을 위해 '잘못된' 하천에 이르렀지만 결국 녀석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밝혀진다면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번식에서 예상 밖의 행운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논란의 소지가 없는 새로운 번식지에서 온전히 하나의 개체군을 형성하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훈계에 비유하면,

'불완전한' 집 찾기는 일부 자손에게 목숨을 구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며 그렇게 살아남은 자손은 새로운 개체군의 선구자가 된다.


아무런 특색 없는 망망대해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부어 종에게는 딱히 지표로 삼을만한 것이 없다.

한마디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 녀석들은 큰 무리를 이루며 헤엄친다.

서로를 지표삼아 '무리에게로' 향하는 습성은 수많은 동물의 생존 전략으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그런 전략이 언제나 효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어느 종의 전략이 다른 종의 대응전략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람이든 경계선은 필요한 법이다. 세포 수준에서는 세포막이 그 경계선에 해당한다.

세포박은 세포 내부를 외부 환경의 혼란으로부터 분리시켜 복잡한 구조와 생리가 형성, 유지될 수 있게끔 해준다.

물질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경계선이 없었다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복잡하면서도 우아한 에너지대사의 화학반응,

유전학, 생식은 불가능했거니와 설령 가능했더라도 오래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진화해온 여느 존재와 마찬가지로 집 역시 경계를 가진 영역이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장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밑돌 배치나 나무 심기처럼 몇 세대를 아우르고 물리적 흔적을 남길 정도로 충분한 영속성을 키우는 일이다....

집이란 과거에 대한 이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계획이 공존하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집은 언제나 상상 속에 머무는 공유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억과 감정을 갖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모든 조류와 모든 표유류에게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을 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 동물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특정한 감각이 있다는 것이다.


메뚜기 떼, 나그네비둘기는 물론 들소 역시 자신들이 모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타날 극적인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는 녀석들이 살던 세상을 바꿔 놓았다. 또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방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바꿔놓고 있다.

현재 궤도로 우주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탑승한 기술은 그런 세상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외견상 공동체 내부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스템을 완성한 다음

메뚜기 떼와 나그네비둘기처럼 다음번 호재를 찾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군상을 이룰 수도 있다.

이 경우 고래에 맞선 청어 떼처럼 지금까지 입증돼온 함께 뭉치는 생존전략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뭔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행성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삶에 대한 이야기를하고 나서 침울한 분위기로 글을 마칠 생각은 전혀 없다.

요지는, 이미 일어난 사안의 중대성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춘 '저들' 모두와는 바로 그런 점에서 다르며, 우리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나머지 존재들과도 차별된다.

공유지와 개럿 하딘이 제기한 '공유지의 비극'을 만들어낸 집 경계선의 파괴가 공도의 적에 맞서 거대한 집단을 이루고 힘을 모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월트 켈리의 만화 케릭터인 오커퍼노키 습지의 포고는 최고이 명언을 남겼다.

"우리의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네."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참나무 틈, 벌 사냥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