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들/책에 있는 글

언어의 온도(이기주 지음)

음풍농월. 2017. 5. 28. 13:39

친구를 앞에두고 "넌 얼굴도 예뻐"하려다 실수로 "넌 얼굴만 예뻐"라고 말하는 순간,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됩니다.

단어 하나로 우리의 글은 얼마나 뜻이 달라지는가?

글이 가지는 온도를 잘 나타낸 말이다.

시를 쓰듯 쓰여진 글이다.

언어의 섬세함에 놀라고 언어의 위력에 세삼 경계의 마음을 가져 본다.


섬세한 것은 대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예민합니다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좌우봉원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맞딱뜨리는 사물과 현상을 잘 혜아리면 근원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공부의 원천이라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염치는 본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본질은 다른 것과 잘 섞이지 않는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엉뚱한 방식으로 드러나곤 한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 관심은 폭력에 가깝고, 상대에게 노력을 강요하는 건 착취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외로움에 사무치면 자신의 그림자라도 부둥켜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고,

사랑을 줄 대상을 찾지 못해 정을 마음에 담아두기만 하면 어느 순간 곪는다고 강변하는 친구 A가 있다.


'남'을 속이면 기껏해야 벌을 맏지만 '나'를 속이면 더 어둡고 무거운 형벌을 당하기 때문이다.

후회라는 형벌을....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가 외부로 향하는 건 그렇다치자.

문제는 그런 태도가 내부로 향할때다.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인 듯하다.

순응 아니면 체념이다....

"조난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건 식량부족도 체력 저하도 아닙니다.

조난자는 희망을 내려놓는 순간 무너집니다. 체념은 삶에 대한 의지까지 꺽습니다."


정말 좋은 질문은,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게 한다.

그리고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발판인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내 내면에서 스멀스멀 피어 올랐던 질문처럼 절박하고 명확한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걸 따라가는 과정에서 널찍한 신작로는 아니지만 나만의 샛길을 발견하곤 했다.

호기심이 싹틀 때, 원래 그렇다'는 말로 억누르지 않았으면 한다.

삶의 진보는, 대개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이 정도면 애썼다고, 잘 버텼다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그러면서 슬쩍 한 해를 음미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내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기주야, 인생이란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애지욕기생이란 말이 퍼뜩 떠올랐다.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글'이 '긁다'에서 파생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글쓰기는 긁고 새기는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글은 여백 위에만 남겨지는 게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도 새겨진다.

마음 깊숙이 꽂힌 글귀는 지지 않는 꽃이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때론 단출한 문장 한 줄이 상처를 보듬고 삶의 허기를 달래기도 한다.


세상이 시끄럽고 번잡할수록 순수하고 꾸밈없는 고아경을 목격하면 좀처럼 시선을 떼기가 어렵다.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 우린 살아가는 동력을 얻는다.

어쩌면 계절도 감정도, 인연이란 것도 죄다 그러할 것이다.


"라이팅? 글쓰기? 글은 고칠수록 빛이 나는 법이지. 라이팅은 한마디로 리라이팅이라고 볼 수 있지."


기다림은 무엇인가.

어쩌면 기다림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몸은 가만히 있어도 마음만큼은 미래를 향해 뜀박질하는 일.

그렇게 희망이라는 재료를 통해 시간의 공백을 하나하나 메워나가는 과정이 기다림이다.

그리고 때론 그 공백을 채워야 오는 게 있다.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고생물학자인 태야르 드 새르댕은 "유머는 남을 웃기는 기술이나 농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머는 한 사람의 세계관의 문제다"라는 꽤 멋진 말을 남겼다.


"세월이 흐른 뒤 어렴풋하게 깨달았어요. 아니 겨우 짐작합니다.

길을 잃어봐야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진짜 길을 잃은 것과 잠시 길을 잊은 것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린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곤 한다.

글쓰기가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일도 그렇다.

때로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발 뒤로 물러나, 조금은 다른 각도로. 소중한 것일수록.


모든 글은 시작만큼 마무리가 중요하다.

가슴 깊숙한 곳에 촘촘히 박힌 마지막 한 줄이 글의 주제를 바꿔 놓기도 하고 결말의 수준에 따라 '글맛'이 달라지기도 한다....

시작만큼 중요한 게 마무리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다만 꽃향기가 아무리 진하다고 한들 그윽한 사람 향기에 비할 순 없다.

깊이 있는 사람은 묵직한 향기를 남긴다. 가까이 있을 때는 모른다.

향기의 주인이 곁을 떠날 즈음 그 사람만의 향기, 인향이 밀려온다.

사람 향기는 그리움과 같아서 만 리를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인향만리라 한다.


인간은 얄팍한 면이 있어서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종종 착각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안도감이지 행복이 아니다.

얼마 못 가 증발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