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기원(서은국 지음)
행복의 핵심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 두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
이 책의 주제를 요약한 책에 등장하는 말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여전히 100% 동물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이 이유와 목적이 있어 보인다.
강물은 바다를 향해 가고, 봄비는 꽃을 피우기 위해 내리는 것 같다.
이처럼 세상만사를 어떤 원인이나 목적, 계획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관점을 철학에서는 '목적론'이라고 한다.
자연의 그 어떤 것도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품고 있다는 생각, 이 목적론적 사고의 원조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관 또한 다분히 목적론적이다.
그에게 삶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추구하며 그것을 향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때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이라고 보았다.
아침 식사는 출근하기 위해, 출근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한것이다. 인간 행복의 종착지는 결국 행복이라는 것이다...
즉 행복은 최고의 선이 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모든 행위는 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일상적인 일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 혹은 수단이다.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본적인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는 우주'에서 살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은 그 누군가의 계획과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인간은 더 똑똑해지기 위해 살아온 것도 아니다.
물리적 법칙과 화학 반응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 우주고, 생명이고, 인간이다. 그 과정에는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다.
인간은 수천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시계보다 복잡한 존재지만, 이 복잡성 자체가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며, 모든 생각과 행위의 이유는 결국 생존을 위함이다...
동물의 모든 특성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다. 특히 '모든'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인간이 마음은 정말 '무엇을 하기 위해'설계되었을까? <메이팅 마인드> 제프리 밀러, 2000
창의성이나 도덕성 같은 마음의 산물들은 동물 중 인간만이 가진 특성이며, 또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밀러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또한 진화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긴 '도구'일 뿐이다...
바로 공작새 꼬리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위트자체가 생존 필수품은 아니다. 그러나 위트는 그 사람이 가진 마음의 수준을 나타낸다....
창의성과 로맨스의 궁합, 피카소만의 얘기가 아니다. 살바드로 달리, 단테, 구스타프 클림트, 일반 대학생들.... 모두 마찬가지다...
마음의 정신적인 산물들은 사실 몸의 번성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
행복감 또한 마음의 산물이다.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행복은 삶의 최종적인 이유도 목적도 아니고, 다만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점진적 도구일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왜 인간은 서로를 필요로 할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막대한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생존.
세상에 포식자들이 있는 한, 모든 동물의 생존 확률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을 때 높아진다....
사회성은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가장 독보적인 특성이다....
인간의 뇌는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서 설계되었을까? 일평생의 연구를 토대로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다.
우선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자극에도 지속적인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계속 반응을 해서도 안된다.
어쨌든 이 '적응'이라는 강력한 현상 때문에 아무리 감격스러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일부가 되어 희미해진다....
인간은 새로운 것에 놀랍도록 빨리 적응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좌절과 시련을 겪고도 다시 일어서지만, 기쁨도 시간에 의해 퇴색된다...
그렇기 때문에 복권 당첨같은 일확천금의 경험은 장기적인 행복이 관범에서 보면 저주가 될 수도 있다..
복권 당첨 후 그들은 TV 시청, 쇼핑, 친구들과의 식사 같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에서 이전 같은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큰 자극의 후유증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이런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재벌집 며느리가 되는 것(becoming)과 그 집안 며느리가 되어 하루하루를 사는 것(being)은 아주 다른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화려한 변신의 순간에만 주목하지, 이 삶을 구성하는 그 뒤의 많은 시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지만, 실상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살면서 깨닫게 된다.
그제야 당황한다. 축하 잔치의 짧은 여흥만을 생각했지, 잔치 뒤의 긴 시간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승진이나 출세 같은 인생의 변화를 통해 생기는 행복의 총량을 과대평가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행복의 '지속성'측면을 빼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상가 라 루시프코가 400년 전에 지적한 대로 우리는 '상상하는 만큼 행복해지지도 불행해지지도 않는다".
승리의 환희도 패배의 아픔도 놀라울정도로 빨리 무뎌지지만, 우리의 머리는 이 강력한 적응의 힘을 감안하지 않고 미래를 그린다. 그래서 항상 '오버'를 한다.
이것을 가지면 영원히 행복하고, 저것을 놓치면 너무도 불행해질 것이라고.
이렇게 미래를 과도하게 염려하고 또 기대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산다.
대다수 한국인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고등학생은 오직 대학을 가기 위해, 대학생은 직장을 얻기 위해, 중년은 노후 준비와 자식의 성공을 위해 산다.
많은 사람이 미래에 무엇이 되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 이렇게 'becoming'에 눈을 두고 살지만, 정작 행복이 담겨 있는 곳은 'being'이다.
인생은 유한하다.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결국 인생이다.
오늘 아무리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어도, 살기 위해서는 내일 또 사냥을 해야한다.
사냥에 대한 의욕이 다시 생기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다. 오늘 고기를 씹으며 느낀 쾌감이 곧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쾌감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이런 '초기화'과정이 있어야만 그 쾌감을 유발시킨 그 무엇(고기)를 다시 찾는다.
창을 들고 동굴 밖으로 다시 사냥을 나서는 이유는 사실 잃어버린 쾌감을 다시 잡아오기 위함이다.
이 무한 반복의 생존 사이클이 지속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 중 하나가 쾌감의 소멸이다.
소멸하지 않으면 동굴에 마냥 누워 있을 것이고, 계속 누워 있다보면 결국 영원히 잠들게 된다....
적응이란 간단히 말하면, 어떤 일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이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상이다. 행복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보면 야속한 일이다.
수년 동안 몸과 약간의 영혼까지 팔아서 얻은 승진이 주는 즐거움도 불과 며칠이다....
그래서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유학시절, 지도교수가 쓴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큰 기쁨이 아니라 여러 번의 기쁨이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이 거창한 이유가 있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귀족 가문에서 최고만을 누리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스승은 플라톤, 제자는 알렉산더 대왕, 인류 역사에 이렇게 화려한 이력서를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서 그의 행복관도 매우 엘리트주의적이다...
사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정확히 말해 '가치있는 삶'이지 '행복한 삶'이 아니었다....
행복은 가치나 이상, 혹은 도덕적 지침이 아니다. 천연의 행복은 레몬의 신맛처럼 매우 구체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쾌락의 즐거움이 그 중심에 있다.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을 뒷전에 두고 행복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가치있는 삶을 살 것이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첫째, 이 둘은 같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삶의 선택과 관심이 달라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