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조한별 지음)
4년동안 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는 대학.
세인트존스 대학의 특징을 대표하는 말이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기에 이런 공부법에 공감이 간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암기 위주로 공부하기에 기초가 튼튼하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수학에 등장하는 공식에 대한 이해다.
기본적인 원리를 명확히 이해하는 과정은 최소화하고 공식을 외워서 문제 푸는 것에 집중한다.
이런 이유로 복합적인 문제, 즉 기초를 잘 이해해야 하는 문제에 부딛치면 한계를 만나게 된다.
또다른 부분으로는 토론과 논쟁의 문화가 낮은 것도 우리나라의 특징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서로 논쟁하고 합리적 결론을 도출하는 데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취약하다.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고, 의견이 다른 것을 수용하지 못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타협을 찾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수시로 접하는 문제이다.
세인트존스 대학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취약한 부분을 정확히 들여다보는 예제가 된다.
평생을 통한 학습 추구의 길에 있어서,
당신이 어느 나이에 있든 이 책을 가이드 삼아 배움의 방향을 추구해 보면 분명 성장하는 미래가 되리라.
아직도 좋은 추억으로 남는 대학생활의 기억이 있다.
학교내의 영어 학원에 참여하던 학생들이 모여서 방학동안 팝송을 해석하고 노래 부르기 스터디 그룹을 한 적이 있다.
'굿모닝 팝스'가 유행하던 시절이다.
자율적인 모임이기도 했고, 해석도 하고 노래부르던 아름답던 시절이였다.
우리들 기억 속에도 작은 세인트존스의 모습은 존재한다.
첫 번째 수업(授業)은 줄 수, 업 업으로 학업이나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뜻의 수업이고.
두 번째 수업(受業)은 받을 수, 업 업으로 학업이나 기술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의 수업이다.
책이 너무 어려워 다들 모르는 것투성이니, 강의 형식이 아닌 서로 맞대고 고민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토론식 수업이 유일한 배움의 길인 것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진리에 대해 토론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빌 게이츠는 1년에 두 번 일주일 동안, 외딴 곳으로 들어가 회사 직원들은 물론 친구들과 가족들까지 만나지 않고 회사와 사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그는 이 기간을 '생각하는 주'라고 말한다.
세인트존스에서 '죽음의 주'라고 불리는 돈 래그가 빌 게이츠의 생각하는 주와 비슷했다는 걸 이제야 느끼고 있다.
이해는 안되고 수업은 어렵고 해서 튜터들과 상담을 자주 했는데 백이면 백 다 그들은 딱 한 가지만을 요구했다.
질문하라는 것.
이건 나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세인트존스가 모든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수업에서는 매번 수업이 시작되기 전 테이블을 빙 돌아가며 모든 학생들이 질문을 하나씩 던지고 그 질문들을 모아놓은 채 수업을 시작했다...
'나는 무엇이 어떻게 이해가 안 가는 걸까?'
이것이 바로 튜터들이 원했던 과정이고 질문이었다. 드디어 '진짜 생각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은 무책임하고 게으른 말이다.
몸의 게으름이 아닌 생각의 게으름에서 나오는 말인 것이다.
그 대상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고 여전히 별로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된다면 왜 이해가 안 되는지 '진짜 생각'을 시작해봐야한다.
질문은 배움을 가져온다. 그래서 중요하다.
질문은 배움을 얻기 위한 과정이고 단계이기 때문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알고자하는 욕구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진짜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사물, 현상,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과 의견을 바르게 확립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배움'의 의미이고 진짜 똑똑하다는 것의 의미다.....
"질문하라. 그리고 그 질문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 배움을 얻어라!"
오늘 하루 물 주고 내일 꽃이 피지 않았다고 우울해져서 그날 할 일을 포기하지 말라고.
오늘의 감정에 좌지우지 되지 말라고.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끈기를 가지고 꾸준히 하다 보면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 분명히 보일 거라고 했다.
내 인생이라는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있는데 세상에 배울 것들, 읽어야 할 좋은 책들, 생객해야 할 거리들은 너무나 많다.
꾸준한 스스로 학습을 통해 여러 사물과 현상에 대해 나만의 가치관을 바르게 세워나가고 싶다...
오늘의 무지에서 조금이라도 더 깨어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나 자신을 믿고, 주관을 길러내고, 생각을 발전시키고, 그걸 적절한 매너와 함께 표현하는 것이 토론 그리고 소통을 잘하기 위한 핵심이다.
쓰기는 '배움의 꽃'이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 등도 다 중요하지만 나는 쓰기를 감히 '최고의 배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고전을 읽고 여러 의견을 듣는 것이 '정보 습득의 과정'이고,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정보 공유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쓰기는 '정리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자신의 의견, 다른 이들의 의견을 총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괜찮아. 열심히 하면 돼'하는 마음으로 노력했다.
좀 나아졌나 싶은 때가 왔지만 착각이었는지, 늘 또 다른 내 형편없는 모습에 좌절해야 했다.
앞에 놓인 산을 넘고 또 넘고 나면 그 뒤로 또 다른 산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조금 나아졌나 싶으면 쉴 새 없이 밀려오는 한계에 부딪혔다. 그렇게 계속 한계에 부딪히는 건 생각보다 지치고 힘든 일이었다.
수업시간의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 조그만 점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은 날, 너무 힘들어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날이면 아예 학교를 뛰쳐나갔다.
열심히 달렸다. 산으로, 도로로, 황량한 흙길을 달렸다. 달리면서 혼자 꺽꺽 소리 내 울기도 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었지만, 이열치열이라고 외로울 땐 정말 한없이 외로워야 할 것 같았다.
그러기에 산타페의 황량한 자연은 마치 중세시대 교부들이 고독을 마주했던 사막처럼 최상의 조건이었다.
그렇게 4년간 끊임없이 초라한 내 모습을 봤고, 노력했고, 좌절했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흐르면 '마침내 무언가를 배웠다'거나 '드디어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그냥 포기해버린 것이다.
욕심과 비교를 내려놓고, 초라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 것. 그게 내가 한 포기였다. 내 한계를 받아들였다. "그래, 이게 그냥 나구나."
근데 더 놀라웠던 건 그 다음부터다.
내가 내 한계를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해지고 오히려 배움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그렇게나 배워보려고 발악하고 노력했는데, 내려놓고 보니 배움이란 이렇게 쉬운 것이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정말 단순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