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1: 충격과 공포(김태권 지음)
로마 제국이 붕괴되고, 이슬람이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
이슬람은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우선 목적이였다.
단지 개종을 하는 경우, 세금을 줄여주는 혜택을 주었고 나중에는 세금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개종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도시를 파괴하고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노예로 팔던 로마제국의 침략 방식에 비하여 대단히 평화적이였음은 확실하다.
이슬람의 확장은 동로마의 저지로 제동이 걸리며 지중해는 셋으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서유럽 문명, 이슬람 세계, 동로마 제국.
서유럽 문명은 성장하여 서기 800년에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한다.
이때까지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영통의 분쟁은 있었지만, 종교적인 분쟁은 없는 상태였다.
이슬람교 자체가 그리스도교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에 그리스도교를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새를마뉴가 사망하면서 서유렵은 군웅할거의 난세로 접어들게 되고 농민들이 일하면 그 결과를 가로채가던 전사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중세 기사의 시작이였다.
기사와 농민의 갈등은 깊어져 갔고, 사회 갈등을 중재하던 존재로서 그리스도교 교회가 나서게 된다.
교회는 '신의 평화'라는 평화 운동을 통해 기사 집단의 야성을 길들이고자 했으나 반발에 부딪치자 내부의 공격력을 외부로 돌리고자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신들의 적인 이교도에 대항하여 무기를 드는 것은 허용할 만한 일인 동시에 경건한 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적대관계가 시작된 것이며, 11세기에 벌어진 일이다.
십자군 원정의 시작은 은자 피에르로 부터 시작된다.
계시의 말씀을 내세우며 예루살렘 성지 해방(에루살렘 자유작전)을 주장하던 은자 피에르를 내세워 민중을 현혹하는 과정을 거쳐,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슬람 세계로의 원정을 선언한다.
1096년 봄, 은자 피에르와 빈자(군중으로 이루어짐)의 군대가 출발한다.
그들은 길을 잘못들어 독일로 접어들었으며 그곳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학살한다.
이것은 서유럽의 반유대주의의 효시였다.
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이들은 농도였고, 그들이 학살한 유대인 역시 학대받는 사람들이였기에 학대받는 이들끼리의 싸움이 이해할 수 없을 따름이다.
원정에 참여한 이들은 몸에 지닌 것이 없이 출발했기에 헝가리를 지나는 과정에서 약탈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약탈에 대한 응징을 위해 헝가리 사람들은 뭉쳐서 반격을 하게 되고 군중십자군의 대부분은 갑옷도 없는 농민들이니 패배하게 된다.
은자 피에르의 군대는 헝가리 국경 마을 셈린, 니시로 가면서 연속적으로 참패하게 된다.
동방의 승리였다.
군중 심자군들의 생존자들은 콘스탄티노플로 모여들고, 바실레이오스(동방 황제의 명칭) 이에 대한 처리로 고민을 한다.
결국, 군중십자군을 태운 배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투르크의 땅으로 향한다.
투르크의 땅에서도 약탈은 계속되다.
은자 피에르는 약탈이 충분함을 느끼고 에루살렘으로의 진격을 주장했으나, 가난한 예전으로의 복귀를 거부한 강병파들은 제리고르돈 요새로 향한다.
그들은 투르크의 계략에 말려들어, 제리고르돈 요새에서 봉쇄된다.
봉쇄 8일째 기사 르노와 일당들은 투르크족에게 십자군을 넘기고 자신들은 생존한다.
남아 있는 십자군은 은자 피에르와 함께한 자들.
술탄은 첩자들 보내 제리고르돈 요새에 있는 십자군들이 어마어마한 약탈을 하고 있으며 자기들기로 수입을 독차지하려고 연락도 하지 않는다고 선동한다.
이렇게 신중하게 행동하던 은자 피에르의 십자군마저 전멸 당하지만, 은자 피에르는 구원부대의 덕택으로 생존한다.
진시황은 "과거를 빌어와 현재를 비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분서갱유를 실시했다고 한다.
이렇듯 과거의 교훈을 되살리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폭력에 맞서는 당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대중의 기억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많은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고 싶어한다.
글쓰는 사람을 매수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비싼 돈을 들여 여론을 호도하며, 심지어 군대를 풀어 약한 자들의 입을 틀어 막는다.
폭력이 횡횡하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은 몸을 사리고 있다. 폭력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억의 불씨가 살아 있는 한, 기회가 올 때마다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일어서서 싸울 것이다.
기억이 남아 있는 한, 폭력은 아직 승리한 것이 아니다.
기억은, 살아남는 다는 것 그 자체와 더불어, 폭력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무기이다.
1898년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필리핀 섬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고 했다."
"그 섬 주민들을 문명화하고 기독교화 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느날 자정 백악관 복도를 걷다가 하느님과 얘기를 나누었다고 맥킨리는 말했다."
열화우라늄탄이란?
방사능 폐기물을 원료로 하는 신형무기.
미군은 1차 이라크 전쟁(걸프전)에서 이 무기를 이용, 이라크의 전차 부대를 무력화시키는 전과를 올렸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미군 병사 70만명
가운데 30만명이 암과 백혈병, 만성 두통 등의 질병과 장애에 시달리고 있어, '걸프전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전쟁 이후에도 그 지역에서 계속 살면서 열화우라늄탄에 오염된 식수를 섭취해 온 이라크 주민들의 피해는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군중십자군의 다양한 부대
1)고티에 쟁자부여(무일푼의 발터)의 선발대
2)은자 피에르의 본대
3)폴크마르의 부대
4)고트샬크의 부대
5)에미코 백작의 부대
6)기사 르노(레이날도)의 부대
군중십자군의 행군
헝가리 경유 -> 비잔틴 제국 진입 -> 콘스탄티노플 도착 -> 보스포루스를 건너 -> 소아시아 도착
십자군 전쟁의 명분
무슬림은 에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를 박해하였는가?
에루살렘은 여전히 기독교도들에게 무척 안전한 곳이었다.
무슬림에 의한 박해가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서유럽에서 '아님 말고'식으로 퍼뜨린 흑색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왜곡은 무슬림들이 겪은 학살도 결국 그들 스스로 원인제공을 해서 일어났다고 은연 중에 주장하는 셈인데,
하기야 침략자들은 늘상 자기 보호를 명분으로 걸지 않던가.
무지함이야말로 잔인함의 근원이외다
예컨데, 가족하고 있을 땐 나쁜 짓을 안하던 사람도 모르는 사람들하고 있을 때엔 가끔 나쁜 짓을 하잖아요?
아무튼, 모르는 이에게 잔인해지기가 쉽다오...
"아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일거예요?"
"얘야, 네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오직 외국놈들만 족칠거란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어 우리 강경파가 득세한 거란다.
전쟁불사를 외치는 자들에게 이런 고통을 직접 겪고 싶냐고 묻고 싶어요.
비인간화: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여길 때 사람들은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전쟁 중에 있는 적국들은 상대국 사람들을 비인간화시켜, 인간적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며 자신들의 파괴적인 행동을 정당화 시킨다.
상대방에 대한 비인간화는 상대방에 대한 호칭에서부터 나타난다.
<팔레스타인> 조 사코 글.그림
<레퀴엠> 진중권
<미국민중저항사>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
<폭격의 역사> 스벤 렌드크비스트
<이라크에서 온 편지>
<말해요, 찬드라> 이관주
<사회심리학의 이해>
<20세기의 문명과 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