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 지음)
지금까지의 전쟁에 대한 책들은 남자 중심이였지만, 이책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에 참여한 백만 명 이상의 소련 여성들.
남자들과 똑같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탱크를 몰고, 전투기를 조종하고, 저격병, 빨치산, 지하공작원, 그리고 총을 들고 일반 전투병으로 싸웠다.
승리와 패배, 영웅이 아닌, 한 인간이 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감정, 기억들을 말하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결과일 것이다.
전쟁은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전쟁이 현실이 되었을때 당사자, 그리고 당사자의 가족이 살아남을거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의 온전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기도 어렵다.
고난은 남루하고 힘겨운 우리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사람은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지나온 세월이 바로 자신의 삶이었으며, 이제 그 삶을 받아들이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은 자신 안에 또다른 자신을 몇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 다른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까? -도스토엡스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 속에 담는다.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일고 보았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 속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은 행목하거나 불행하다.
사람은 전쟁터에서 가장 잘 드러낸다.
내면의 깊은 곳까지, 저 깊숙한 피하조직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사랑할 때도 그럴지 모르겠다.
죽음의 얼굴 앞에서는 모든 사상과 이념이 그 의미를 잃는다.
누구도 미리 대비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영원의 세계가 열린다.
긴 머리 대신 뭉툭하게 잘려나간 짧은 앞머리, 뜨거운 죽냄비와 국그릇들이 돌아오지 않는 주인들을 기다리고 전투에 나갔다 무사히 돌아오는 사람은 백 명 중에
일곱 명정도였다는 이야기. 혹은 시장에도 못다니고, 심지어 붉은색이라면 사라사 천도 처다볼 수가 없었다는 사연들....."
"글쎄, 전쟁이 끝나고 벌써 4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 하지만 내 집에서 붉은색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을걸.
전쟁 이후로 붉은색이라면 치가 떨려."
그 무섭다는 공포영화에서도 그런 건 본 적이 없어.
쥐들이 공습을 미리 알고 그렇게 도시를 빠져나가는 건. 그러니까 스탈린그라드를 벗어나...뱌지마 근교로 이동해 있을 때였어.... 세상에,
아침에 쥐들이 떼 지어 도시를 빠져나가는데... 쥐들이 먼저 죽음의 냄새를 맡은거지.
수천 마리의 쥐들이 들판으로 향했어...까맣고 축축한 쥐떼들이.... 사람들은 겁에 질려 불길한 광경을 지켜보다가 다들 문을 꼭꼭 걸어잠갔지.
사람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정신 나간 생각과 의기투합할 수 있는가? 심지어 죽일 의무가 있다는 생각까지 하다니.
전쟁에는 죽음을 제외하고도 다른 수많은 요소들이 존재하며, 전쟁터에서도 평범한 우리네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쟁 이 또한 삶이라는 사실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의 진실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질문들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왜 악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가? 정녕 우리 안에 악을 향한 놀라움은 없단 말인가? 와 같은 질문들 앞에서.
"둘째를 기다리고 있었어.......두 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었고, 둘 째를 임신중이었지. 그런데 전쟁이 난거야. 남편은 전선으로 떠났지.
나는 친정으로 가서 수술을 했어.....그러니까., 그게 뭔지 알아? 임신 중절 수술.... 물론 당시 낙태는 금지돼 있었지만....어떻게 낳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지... 전쟁이라는데! 죽음이 판치는 세상인데,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고.
"독일군이 마을에 들어왔어...커다란 검은 오토바이를 타고..... 나는 있는 대로 눈을 크게 뜨고 놈들을 봤어.
모두 젊고 즐거워 보이더군. 계속 웃더라고. 그것도 큰 소리로 껄껄대면서!
놈들이 여기, 우리 땅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게다가 즐겁게 웃는다는 사실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어.
늙은이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젊은이는 죽음에 코웃음 치지.
젊은이들은 자기가 영원히 살 줄 아니까! 나도 그땐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았으니까...
"의학전문학교를 좋업하고...집에 돌아왔더니 아버지가 병이 나신거야. 거기다 전쟁까지 터지고.
아침이었어... 전쟁이 났다는 무서운 소식을 들은 건... 풀잎에 맺힌 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전쟁이라니.
풀잎이며 나뭇잎에 송알송알 맺혀 있던 이슬방울들, 그날 아침 예쁘게 반짝이던 그 이슬방울들이, 전쟁터에서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어.
자연은 사람들의 불행 따윈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어. 태양은 밝게 빛나고... 내가 좋아하는 캐모마일은 온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고....
..그리고 다시 쏟아지는 독일군의 총소리 "따다다다....' 총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어. '밀 잎사귀의 속삭임을 나는 언제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그 다정한 속삭임을....."
밤새 날이 밝을 때까지 내가 보초를 서기로 했던 건, 새소리가 듣고 싶어서였어.
딱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지. 밤엔 고향을, 평화로운 지난날을 느끼게 하는 그 뭔가가 있었거든.
폭격은 밤에야 끝이 났어.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눈이 내렸지. 우리 병사들 주검 위로 하얗게... 많은 시신들이 팔을 위로 뻗고 있었어....하늘을 향해...
행복이 뭐냐고 한번 물어봐주겠어? 행복....그건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적처럼 산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야....
그런데 이 신참병사가,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었는데, 총을 안쏘겠다는거야. '나는 쏠 수 없소! 나는 살인하지 않겠소!'라며 총 쏘기를 거부했어.
다들 사람을 죽이는 데 동의했는데, 그 사람만 아니었지. 그 시절?
그 시절은....끔찍했어....왜냐하면.....그 신참은 군법회의에 부쳐졌고 이틀 후에 총살을 당했어....빵빵!....
이제 나도 알아.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걸. 자주 그 일을 생각해...왜냐하면....왜냐하면 나도 이제 늙었거든...내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무엇이든 더 쉽게 적응했어.... 우리는 눈물나게 집을 그리워했어.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지. 집의 아늑함도 너무 그립고.
우리 중에 나타시카 질리나라고, 모스크바 출신인 아이가 있었거든. 그런데 그 아이가 '용맹한 병사' 메달을 받고 포상으로 며칠간 집에 다녀오게 된거야.
나타시카가 집에서 돌아오자 서로 나타시카의 냄새를 맡겠다고 난리가 났지. 정말 돌아가며 줄을 서서 맡았다니까. 그렇게 다들 집을 그리워했지.
전쟁터에서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됐소.... 확실히! 내가 전쟁터에서 훨씬 괜찮은 인간이 된 건 분명한 사실이어. 그런 고초를 겪었는데 당연하지 않겠소...
그곳에선 살아가는 데 중요하지 앟은 건 금방 제거해버리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든.... 하지만 전쟁도 우리에게 앙갚음을 했소.
우리를 쫓아와 우리와 나란히 가고 있어요...
가구도 보다시피 다 오래된 것들이야. 바꾸기가 아까워서.
사람들과 한집에서 오랜 시간 함께 산 물건들은 비록 물건이라도 영혼이 깃드는 법이거든. 나는 그렇게 믿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2차 대전이 미국 혼자 히틀러와 싸워 승리한 전쟁으로 알고 있어요.
소련 사람들이 그 승리를 위해 치른 대가, 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소련 사람이 치른 2천만 명의 목숨값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아요.
아, 얼마나 집이 그리웠는지 몰라! 아버지가 없어도 엄마가 없어도 집은 좋은 곳이야.
집, 그건 그 집에 사는 사람보다, 그 집 자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무엇이지. 특별한 그 무엇.... 사람은 반드시 집이 있어야 해.
'다들 전쟁에서 트로피를 가져왔지만 나는 남편을 데려왔죠. 딸도 있어요. 지금은 손자들이 자라고 있지요'....당연히 사랑도 있었지!
암, 있었고 말고! 사랑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살아남을 사람이?...
인생은 사랑과 기쁨이라는 걸 깨달았고 전쟁이 끝나면 그렇게 살고 싶었으니까.
"개가 앞장서서 우리를 집안으로 안내했어....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갔고. 갔더니 문지방에 아내와 아이들 셋이 역시 죽어 있었어...
개가 그 사람들 옆에 앉아 우는데, 진짜 울더라니까. 꼭 사람처럼....."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깥이 무한하다면, 이렇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만큼.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정말이다!).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 아이가 죽어서 관속에 누웠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거야....꼭 어여쁜 신부 같더라니까.
자식을 갖는다는 건 정말 두려운 일이야. 어리석은 일이지....자, 보다시피 지금 우리 사는 게 이래... 아들네랑 같이 살지.
아들은 의사야. 부장의사. 작은 아파트에서 온 식구가 함께 살아. 나는 휴가 때도 어디에 가본 적이 없어.여행 한번 안 다녀왔지....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건 아들이나 손자들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야. 우리 아들도 마찬가지고. 아들 역시 어디에 가본 적이 없어.
아들이 의사 생활을 시작한 지 곧 25년이 되는데, 그동안 여행 한 번 안갔으니까.
단 한 번도 아들이 한 번도 휴가를 신청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병원 사람들이 다 깜짝 놀라지.
'엄마, 나는 엄마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아요.' 우리 아들이 늘 하는 말이야. 며느리도 아들하고 크게 다르지 않고.
말로는 설명을 못해...우리 가족은 단 며 칠도 서로 떨어지기 싫어서 다차도 없이 살아. 나는 아들네 없이는 잠시도 살 수가 없어.
전쟁터에 나가본 사람이면 하루를 떨어져 지내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거야. 기껏해야 하루인데도....
아무튼 사람을 죽이는 건, 명분이 옳든 그르든 할 짓이 못 돼. 역겨운 일이지.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 <마지막 증인들> <아연 소년들> <체르노빌의 목소리> <세컨드 핸드타임>
지은이는 1946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으며,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