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권리(정여울 지음)
지금까지 읽은 책중에서 이렇게도 많은 책을 소개한 책은 없었다.
긍정, 성장 ,미래를 밝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책에서 소개된 책을 서서히 읽어나가야겠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에서 -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으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가리라.
누가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참다운 인간은 집단이 강요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 불복종에서 -
확산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아주 작은 나뭇가지가 결국 수천,
수만 개의 가지로 뻗어 나가듯, 처음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몰고 나갑니다.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모습대로 되고,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바로 그 사람이다 -파라켈수스-
우리 뒤에 뭐가 남았는가?
든든한 성채라도 서 있는가?
아니다. 여기가 우리 죽을 자리다.
우리밖에 없다. 구원의 빛은 싸움에 있다. -호메로스, 일리아드에서 -
현대인은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립니다.
슬픔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왠지 촌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지요.
슬픔따윈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 세련된 인간으로 평가받는 분위기에 저는 아직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저기서 힐링 열풍이 거센 요즘, 이 요란한 힐링 열풍에는 뭔가 불편한 광기가 스며 있습니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뭘까요?
아픔에 대한 성급한 알레르기 반응이 아닐까요?
아픈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듯한 조바심, 아픔은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 믿는 조급증, 아픔의 의미를 곱씹어 보기도 전에 아픔을 무차별적으로 퇴치하려는
성급한 통제의 욕망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통증은 공포를 자아내지만 분명 우리에게 어떤 절박한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그 통증의 메세지를 우선 가만히 들어 보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쉽고 빠른 진통제만 찾다가 놓치는 건 뭘까요? 바로 고뇌하고 진통하는 능력입니다.
현대인은 아픔에서 도망치느라 아픔이 가르쳐 주는 진실을 외면해 온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누구도 '한 줌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 만큼 힘겨운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가장 윤리적인 존재가 가장 참혹하게 고통받는 이 세상의 은유로 다가옵니다.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고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은 '먼저 깨달은 자'라는 멋진 뜻을 품고 있지요.
그는 남보다 먼저 생각하여 먼저 깨어난 자,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세상의 빛이 될 진실을 미리 알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자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또한 불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었지요. 바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할 수 있는 이성입니다.
이성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고뇌하고 성찰로서만 빛을 발합니다.
이성의 밑바닥에는 공정함을 향한 감수성이 놓여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좇지 않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덜 고통스러우며,
고통받는 이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자신의 힘을 더 좋은 쪽으로 쓸 줄 아는 감수성을 발휘해야 하지요
"어떻게든 되는 시골 생활은 없다. 어딜 가든 삶은 따라온다."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다. 자연의 성깔을 알야야 한다."..
"고독은 시골에도 따라온다. 외로움을 피하려다 골병든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고요해서 더 시끄럽다. 윗사람이라면 껌뻑 죽는다. 다른 목소리를 냈다간 왕따당한다."
"깡촌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시골로 이주하는 범죄자들. 가능한 한 큰 개를 길러라. 수제 창을 준비해라. 군침을 흘리며 당신을 노리고 있다."
"당신은 진정 홀로서기를 한 사람입니까?" 당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 한 번만이라도 완전한 홀로서기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외로움도 느끼지만, 혼자 있어야만 만날 수 있는 내면의 '나'를 느끼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도 그대의 공허감을 채워 줄 수 없다. 자신의 공허감과 조우해야 한다. 그걸 안고 살아가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순간에도 혼자 있음을 자각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어떤 소문과 세파 속에서도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나가 아닌 '진정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들은 고독의 시간에 찾아옵니다.
인생의 문턱을 넘는 온갖 입학 및 면접시험의 순간들, 사랑하는 이를 잃고 혼자가 되는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드는 소중한 시간들, 이런 고독한 순간들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내면의 성장을 꿈꿀 수 없을 겁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함께 있는 시간보다 덜 흥미로운 시간이거나 피해야할 시간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하는 진정한 자기 대면의 시간입니다.
실수를 저지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지독한 외로움이었습니다.
이 부끄러움과 외로움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어디에도 없어 보일 때,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고독과 대면하게 됩니다.
내가 저지른 실수는 반드시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깨닫고 그 책임을 이행하는 순간 우리는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는 것 아닐까요.
비록 많은 것을 잃었지만
또한 많은 것이 남아 있으니,
예전처럼 천지를 뒤흔들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다.
영웅의 용맹함이란 단 하나의 기개.
세월과 운명 앞에 쇠약해졌다 하여도
의지만은 강대하니
싸우고, 찾고, 발견하며
굴복하지 않겠노라 - 앨프리드 테니슨, 율리시스에서 -
삶에 생기가 떨어져 간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은 '동경하는 것들'이 사라져 갈 때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마음으로 느끼는 공감의 기술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영화를 볼 때는 눈물을 아끼지 않으면서 정작 살아 있는 옆 사람의 고통에는 무감각해져 갑니다
연민은 아픈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의 고통을 안방의 탤레비젼으로 시청하며 ARS로 3000원을 기부하는 아늑한 자기만족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공감은 당신이 지금 고통받고 있는 그 자리로 달려갈 수 있는 용기의 시작이며, 타인의 고통을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적극적인 힘으로 단련시키는
삶의 기술입니다.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길들이고 어루만지며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영혼의 체력을 기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말했지요. 역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은 나쁜 사람들의 짜증나는 아우성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의 오싹한 침묵 때문에 일어난다고.
그는 시종 100명을 잃고 살을 에는 추위와 처음 경험해 보는 배고픔 속에서,
아무리 초라해도 잠시나마 폭풍우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움막을 찾는 나그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나는 춥구나. 얘야, 움막이 어디 있느냐? 궁핍은 더러운 것을 귀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구나. 자, 움막으로 가자." -세익스피어, 리어왕 -
"아무튼 학교를 졸업하면 당장 집을 나가야 한다.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제 2의 탄생을 뜻한다."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 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
"자기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는 그것이 반드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라."
열등감은 무언가를 열심히 쌓아 올리는 데 터전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정의는 때로는 맹목적인 충성의 다른 이름일 때가 많습니다....
A.G. 비어스는 <악마의 사전>에서 정의를 이렇게 풍자했지요.
정의란 "충성, 세금, 개인적인 봉사에 대한 보수"이며, "한 나라의 정부가 국민에게 파는 품질 나쁜 상품"이라고.
정의가 상호 간의 신뢰가 아닌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힘의 행사로 유지될 때는 이미 정의가 아니라 폭력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세상은 무섭습니다. 하지만 이 무서운 세상을 아무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훨씬 더 무서운 세상이 아닐까요.
우리가 죽는 날까지 삶에 대한 배움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먀말로 젊음의 비결임을. 배움이 꼭 책 속에 있지만은 않지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모든 사건, 타인, 사물, 공간들이 우리에게 스승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지위나 재산같은 외적인 가치가 아닌 나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에서 찾는 지혜입니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일에 대한 열정과 놀이의 능력을 하나로 만든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에서 -
일필휘지로 어느 날 밤 하루 만에 글을 쓸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뮤즈의 환상'을 버려야만 진정한 창작의 자유가 찾아옵니다.
로렌스는 주변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사방이 코르크로 막힌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을 고문하듯 글을 썼습니다.
헤밍웨이는 항해일지를 쓰듯 작업 일지를 썼지요.
미래의 스케줄을 욕심스럽게 빼곡히 적어 놓는 것보다 내가 오늘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를 차분히 정리하고 겸허하게 통찰하는 것이 실제 글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알 수 없을 때 나를 지키기 위해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감자기 받으면 아무리 씩씩하게 살아가던 사람도 다리가 휘청하게 됩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싶으면 어제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 보라."
우리는 보면서도 보지 못합니다. 존재를 보고 있지만 존재의 의미는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더 오래, 더 깊이, 더 사려 깊게 사물을 관찰하는 삶은 우리에게 세상을 향한 깊은 애정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강인한 사람들은 고통을 제거하거나 고통으로부터 회피하려고만 하지 않고, 고통을 통해 끝내 성장합니다.
고통 자체를 피할 수는 없지만 '고통과 친해지는 법' 또는 '고통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는 법'은 배울 수 있지요.
그리하여 내면의 그림자야말로 성장의 동력이자 창조의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눈에 보이는 내 모습보다 훨씬 커다란 나,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지닌 진정한 '나'가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밀턴 H 에릭슨 <밀턴 에릭슨의 심리치유 수업>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오이겐 드레버만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호메로스 <일리아드>
스포클래스 <안티고네>
구스타프 융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아이스킬로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인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 라스무스와 방랑자><내 이름은 삐삐 통스타킹>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타인의 고통>
데이비드 리프 <다시 태어나다><해석에 반대한다>
로버트 A. 존슨 <내면의 황금>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마음 사전>
장뤼크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고병권 <철학자와 하녀>
이창래 <척하는 삶>
우치다 타츠루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마루야마 겐지 <나는 길들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이반 일리치의 유언>
알프레트 아들러 <인간 이해><심리학이란 무엇인가>
김서영 <내 무의식의 방>
존 읠리엄스 <스토너>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제인 오스틴 <이성과 감성>
정혜신,진은영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마커스 주삭 <책도둑>
A.G 비어스는 <악마의 사전>
알리스 <백년의 지혜>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자본론>
와타나베 아타루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루이즈 디살보 <최고의 글쓰기 어떻게 글을 쓰는가>
윌 슈발브 <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북클럽>
자크 아탈리 <자크 아탈리, 등대>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관찰의 인문학>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데이비드 리코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