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신영복 지음)
당신은 주위에 멋진 Role Model을 가지고 있는가?
그 사람을 보면 닮아가고 싶고, 나를 가다듬게 만드는 사람.
그리하여 나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나의 인생을 더욱 나아지도록 받쳐주는 사람.
당신이 혼란에 빠졌을 때 나침판이 되어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
그를 통해 당신은 자신의 미래를 본다.
이런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변에 그럼 사람이 없을지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책 속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다.
모든 게 완벽하지 않지만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인생 전체를 거쳐서 나침판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책속에는 널려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꾸준히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유년 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고향을 떠난 삶이란 뿌리가 뽑힌 삶이지요. 나는 사람도 한 그루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에는 고대부터 사관에 좌우 2사가 있었는데 좌사는 왕의 언을 기록하고 우사는 왕의 행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각각 상서와 춘추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자의 언행을 기록하는 이러한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 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후의 지옥을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속력이 강한 규제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죽백에 드리우다'라는 말은 청사에 길이 남다라는 뜻입니다.
군자는 무일(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백성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무기 때문이라 하지요.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유가 사상은 서구 사상과 마찬가지로 '진'의 사상입니다. 인문 세계의 창조와 성장이 진의 내용이 됩니다.
인문주의, 인간주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하여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입니다.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입니다. 노자의 귀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소비가 미덕이라니.
끝없는 확대 재생산과 대량 소비의 악순환이 자본 운동의 본질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당연히 욕망 그 자체를 양산해내는 체제입니다. 욕망을 자극하고 갈증을 키우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자구와 부분을 도려내어 학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지요.
미운 사람을 험담하는 경우에 그렇게 하지요.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부분의 확대는 전체의 본질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노자의 철학을 한마디로 '물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도는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도에 가까운 것이 바로 물이라는 것이지요.
물로서 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선약수는 인구에 회자되는 명구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나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인 셈이지요.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를 가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며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있는 듯 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어떤 분야든 최고 단계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교(巧)가 아니라 졸입니다.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봉은사의 현판 '판전'이라는 글시는 그 서툴고 어수룩한 필체로 하여 최고의 경지로 치는 것이지요.
서예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는 환동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로 둘아가는 것이지요. 일체의 교와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법가지도 미련없이 버리는 경지입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장자] 제1편 <소요유,消遙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는 보행과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존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존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뜨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글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세 사람중에 한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길을 모른다면 고생만 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길을 모르는 상태다. 우리에게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일인가.
빈 배로 흘러간다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 배는 목적지가 있을 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그 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삶이 어떤 다른 목적의 수단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若使天下 兼相愛 愛人若愛其身 惡施不孝 - 묵자, 겸애 -
만약 천하로 하여금 서로 겸애하게 하여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한다면'어찌 불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묵주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운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에 의하면 본성은 선악 판단의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DNA의 운동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DNA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 DNA는 40억 년 전으로부터 어느 시점, 또는 장구한 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물질이라는 것이지요.
RNA와 단백질이라는 두 개의 화학물질로 규명합니다. 수십억 년에 달하는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는 바로 이 DNA의 운동이며 그 일대기입니다.
월슨에게 있어서 본성이란 이 화학물질의 운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DNA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생명이며 그런 점에서 곧 본성입니다.
이 DNA의 운동은 자기의 존속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개체의 존속과 개체를 넘어선 존속, 즉 생존과 유전과 번식이 유일한 운동 원리입니다....
이것은 DNA의 생존을 위한 장치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이성은 그러한 장치의 다양한 기능 중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성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 희생, 정직, 종교, 예술 등 일체의 정신적 여역도 이 DNA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우리가 본성을 선악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얼마나 저급한 논의인가를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과 나란히 시서화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이야기를 강의 초반에 나누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병행했던 것이지요....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 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독한 사람보다는 마음시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노촌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위치우위 <세계 문명 여행>
사카구치 안고 <타락론>
나카지마 아츠지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
루쉰 <호루라기 부는 장자>
유안 <회남자>
에드워드 윌슨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