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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식물(마이클 폴란 지음)

음풍농월. 2016. 5. 29. 16:32

이 책은 한 줄 글로 요약된다. 

자연과 인간은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이다.

유전자 조작의 위험성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현재의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생물의 다양성을 유지해나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꿀벌과 꽃의 관계는 소위 공진화의 고전적인 사례다.

이런 공진화 관계속에서 벌과 사과나무는 서로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자기 이익을 챙긴다.

벌이 사과나무 꽃을 방문함으로써 벌은 양식을 얻고 사과나무는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 의식적인 선택이 굳이 있을 필요는 없으며, 또한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늘 내 욕망의 객체로만 생각했던 정원의 식물들이 사실은 나를 이용해 자기들이 직접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대신 수행하게 만드는 주체임을 깨달은 것이다....

길들인다고 할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인간의 일방적인 주도권을 떠올리지만,

이 과정이 실은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고 교묘하게 선택한 진화의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난 1만년 동안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인간에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옷감을 제공하고, 황홀하게 만드는지 등을 고심해온 이 식물들은 자연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진화에 성공했다.


꽃이 벌을 부추겨서 자기를 찾아오도록 만들 듯이 진화는 인간의 의지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의에 따르면, 진화는 거의 무의식적이고 목적의식성이 없는 과정이다.

모든 생물에게 다 그렇듯이, 진화는 어떤 생물 종이 온갖 시행착오를 통해서 될 수 있으며 자기 종을 우월하게 만드는 것이다.


제네바의 세네카 호수 주변에는 유명한 사과 생산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정부에 소속된 기관인 '식물 유전자 자원연구소'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할 만큼 많은 사과나무 품종들을 갖추고 있다.

전세계에서 수집한 2,500여 종의 사과나무가 쌍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교접은 자연에서 새로운 유전자 결합을 만들어 내는 수단이지만, 사과나무는 사과 씨에서 자랄 때처럼 더는 교접을 통해 재생산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이에 반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나 해충은 여전히 교접을 통해서 재생산됨으로써, 사과의 저항력을 뚫을 수 있는 유전자 결합을 찾아내기 위해 계속 진화한다.

그리고 결국 사과를 무너드릴 수 있는 유전자 결합을 찾아낸다.

그러니 사과와 해충 사이의 싸움은 당연히 해충의 승리로 끝난다.

그래서 인간이 농약이라는 현대적인 무기를 들고 나서서 사과나무를 보호해야만 하게 되었다....

다양한 사과 유전자를 될 수 있으면 많이 보존라는 게 중요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결국 생물학적 다양성의 문제죠."


포슬린을 비롯한 미국 학자들이 이때 처음으로 온통 사과나무로 뒤덮인 알마아타의 숲을 보았는데, 이들은 모두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곳의 사과나무들은 보통 수령이 300년되었고 키도 15미터나 되고 둘레는 참나무만큼 굵었다.

몇몇 나무들은 최근 개발된 재배 품종만큼이나 크고 붉은 열매를 달고 있었다.


야생 감자와 야생 사과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어낸다거나 이미 사라져버린 유전자를 되살리지 못한다.

필 포슬린이 좋은 품종과 나쁜 품종을 가리지 않고 온갖 품종의 사과를 더 늦기 전에 보존하고 보급하는 데 온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하며

이 일을 실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은 야생 속에서 보존된다.'고 소로가 쓴 적이 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나 많은 야생지가 사라지자 웬델 베리는 이렇게 말했다.

"야생은 인간의 문화 속에서 보존된다."


나는 정원이라는 질서정연한 풍경 한가운데 선 야생 사과나무 한 그루가 스티븐스의 항아리와 정반대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 사과나무가, 정원에 가득한 팽팽한 긴장을 늦춤으로서

주변의 길들여진 식물들이 각자 자기 내부에 숨어 있는 야생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낼 수 있도록 충동질하지 않을까?

아마도 이 나무는, 야생없이는 문명도 있을 수 없고 쓴 맛이 없으면 단맛도 없음을 일깨워줄 것이다.


'벌은 꽃의 색갈과 모양을 정확하게 기억했다가 나중에 다시 찾아간다.'


자연은 내가 아는 어떤 식물보다 더 기꺼이 이 식물과 유희를 즐기는 것 같다. 존 제러드 <식물의 이야기>


인간과 같은 동물은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무언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고 애를 쓴다.

반면 식물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복잡한 물질을 합성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놀랍고 섬뜩한 능력을 갖추었다.

이 식물들이 합성하는 것 가운데 가장 경이로운 물질은 동물의 뇌에 작용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때로 이물질은 동물의 관심을 끌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동물을 멀리 쫓거나 심지어 아예 없애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마약이 우리의 인식 작용에 기치는 영향 가운데 확실한 것 하나는, 주변적인 삶을 우리에게서 멀리 밀어내고 아주 평범한 것들을 이상적으로 보이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사실 망각은, 그동안 생각해왔듯이 정신 기능의 오류가 아니라 정상적이며 완벽하게 작동되는 정신 기능이다....

만약 매 순간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 가운데서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빠르게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뇌에 샇이는 정보는 엄청나게 늘어날 테고 그 정보에 의해 우리 의식은 압도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정신 건강 여부는 매 순간 의식 안으로 밀려드는 온갖 감각의 바다와 같은 정보를

파악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작은 물줄기 수준으로 축소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카나비노이드 체계는 바로 이 과정에 개입해서 허접쓰레기들은 버리고 해야 할 일들을 하며 하루 이을 무사히 마치는 데 꼭 필요한 것들만 기억하도록 한다.

결국, 정신 건강의 많은 부분이 망각에 있다는 말이다.


대마초를 피우면 감각은 보다 선명하고 예리해지며, 통찰력의 깊이가 한층 더 깊어진다.

또 이게 가장 중요한 현상인데, 시간이 천천히 흐르거나 아예 멈추어버린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시간의 끈을 놓아버리고 현재 이 순간의 경험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망각이라는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할 때 느끼는 경이로움이야말로, 마약을 쓰든 혹은 명상이나 단식 등의 방법을 쓰든,

자기 의식의 상태와 내용을 바구려는 인간 욕망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니체는 '과거에서 이어지는 거대하고 또 거대한 압박'을 벗어던지고,

'아무것도 모른 채 과거의 울타리와 미래의 울타리 사이에서 더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노는' 어린 아이들처럼 그렇게 살라고 충고한다.


선 사상에서는 '현재의 이 순간을 깨우치면, 무한함은 매 순간의 유한함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고 했다.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해서, 자연에는 뚜렷한 종의 구분이 존재한다.

각각의 종은 제각기 특정한 유전자적인 완결성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다른 종 사이에 교접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생긴 자손은 번식력이 없다.

비록 가끔씩 장벽에 균열이 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이런 튼튼한 장벽을 설치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일부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각각의 종을 따로 떼어 놓은 목적은 병원균의 이동 경로를 차단해 종과 종 사이를 넘나들지 못하도록 함으로서,

단 하나의 균 때문에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전멸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성은 본질적으로 어떤 개체군이 멸종의 위협을 받을 때 나타나는 진화의 한 형태이다.

멸종당할지도 모른다는 압박 때문에 해당 종은 멸종 상황을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떤 돌연변이라도 기꺼이 수용한다.

결국 어떤 종이  다른 종을 완벽히 동제하려고 시도할 경우, 다가오는 건 재앙 뿐이라는 뜻이다.


속을 판 통나무 두 개를 엮어서 만든 기묘한 배를 타고 낮잠을 즐기며 오하이오 강을 유융하게 떠내려가는 존 채프먼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생각은 단일 재배보다 다양성의 가치가 우선하고 생태 체계 안에서는 야생성이 필요하다는 본능적인 판단으로 비롯하지 않았나 싶다.


접붙이기나 단일 재배 그리고 유전공학은 생명의 다양성, 종의 다양성과 진화의 가능성을 축소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열려있는 미래의 폭을 줄이는 행위라는 말이다.

동물학자 E.O 윌슨은 생물의 다양성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이것은 10억 년에 걸쳐 진화의 길을 걸어온 생명체들의 집합이다.

이 기간 동안의 모든 폭풍우를 삼켰고, 이것을 유전자로 담았으며, 우리 인간을 창조한 세상을 창조했다. 이것이 있기에 세상은 유지된다."


이 이야기의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거리는 한층 가까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그리고 어던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대로일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의 모습으로...


채프먼 저기 <조니 애플시드: 인간과 신화>

제임스 프레이저 <황금가지>

구디 <꽃의 문화>

스티븐 핀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존 제러드 <식물의 이야기>

사이먼 샤마 <풍요의 딜레마>

알렉산드로 뒤마 <검은 튤립>

올더스 헉슬리<인식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