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들/책에 있는 글

인간의 조건(한승태 지음)

음풍농월. 2016. 4. 24. 22:35

진도의 꽃게잡이,

서울 편의점과 주유소,

아산의 돼지 농장,

춘천의 비닐하우스,

당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

지은이 한승태가 한달 혹은 몇개월간 직접 체험한 직종이다.

요즘말로 3D 업종이다.

무얼 더 보태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어제도 오늘처럼 희망없이 이어지는 나날을 보내다가 세상을 마감하는 이들이 있다.

어린 시절 농사일을 돕느라 힘든 시간을 지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평생을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난 이렇게 살 수 없어.

난 이 상황을 벗어날거야. 도시로 갈거야. 그렇게 나는 도시로 도망쳤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다음에 되돌아 보니,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런 인생을 사셨다.

그 분들은 그런 인생이 억울했을까? 마음이 저려온다.

배부른 푸념이 올 때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보자.

그래도 우리의 인생은 전체를 거쳐 억울할 정도는 아니라고.


배 위에서는 고정된 바닥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바다가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 상태의 기이함을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에야 깨닫는다.

그토록 거대한 존재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뱃일이 힘들지. 그치만 무슨 일이든 다 마찬가진 기라. 막내야 바라.

니가 평생 여 있을 거 아이다 아이가?

이 세상에 있제. 이 세상에 안 힘든 일은 없다.

무슨 일이든 다 힘든 기라. 니 당장은 뱃일이 제일 힘든 거 같제?

여만 나가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제?

근데 그게 안 그렇다.

니 앞으로 무슨 일을 하건 그거 다 힘들 끼라.

내가 앞날이 창창한 아한테 하는 게 아이고 일이란 게 그런 기라.

일은 우찌 됐든 힘든 기라.

그러니까 뭐든지 있다 아이가. 하고 싶어서 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누구보다 많이, 오랫동안 먹었다.

인간은 한계에 처했다고 느끼면 먹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그 당시의 내가 그랬다.

내 머릿속엔 무조건 많이 먹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먹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먹겠다가 아니라 차린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겠다는 것이 내 하루하루 목표였다.


항구에서는 모든 사람의 삶이 하향 평준화된 사회가 주는 만족감이 있었다....

항구에선 더 이상 내 인생이 아무 문제없는 척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내가 이해하기 힘든 사실 중 하나는 그렇게 정 많고 친절한 아저씨들이 정작 자기 배 막내의 고충 앞에서는 냉담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사람들은 가장 나약한 부류에게 가장 힘든 일을 떠넘기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오염 때문에 어획량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는 모습은 왠지 기이해 보였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야.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당장 다른 거 찾아봐야지.

그동안 한 게 아깝다고 어영부영 남아 있다 보면 어느새 나이먹고 내 꼴 나는 거야.

우리 막내한테도 내가 항상 얘기해. 이거 너한테 맞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면 또 할 생각 말라고."


바다에는 묘하게 사람을 억누르는 기운이 있어 더 이상은 못해, 더 이상은 못해, 하는 말이 혀끝에 걸렸어도 결코 입 밖에 내진 못했다.


그마들이 젓갈배라.

사람들이 도망 못 가게 할라꼬 부두 근처에도 안 와.

그러다 먹을 거 사야 되고 이랄 때 갑판장만 부두에 내라주고 바로 또 뒤로 물러서는 기라.

그러니가 어떻게 되겠노? 이 아들이 해도 해도 안 되니까 헤엄이라도 쳐서 나올라고 한 거 아이겠나?


40만원이 내가 6주 동안 일하고 나서 받은 돈이었다.

그것이 바다위에서 죽을 둥 살 둥 통발을 쌓고 나서  받은 대가였다.

남의 돈을 번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하루 여섯 시간씩 일하면 한 달에 37만원 정도 벌 수 있었다.


한 달 30만원 남짓한 돈으로 생활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이 생활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다.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인데, 그것도 예기치 않은 지출이 없을 경우에나 가능하다.

그 무렵 나는 이를 제때 닦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진료비 청구서를 받고서 나는 일자리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이 세상은 돈 없으면 바로 지옥이야.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냐와는 상관없이 모두가 종업원에겐 스트레스를 준자.

그리고 이것이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인데, 그 스트레스는 시간이 지나도, 같은 행동을 아무리 많이 겪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매번 똑같이 괴롭다.

편의점 일이란 게 매일 이런 식이다.

앞에서 예를 든 행동 때문에 결투를 신청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도 매일같이 겪다보면 야구방망이라도 집어 들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적 위상의 피라미드에서 서비스업 종사자의 위치는 가장 밑바닥인 게 분명하다.

먹이사슬 식으로 따져보면 플랑크톤 정도일 거다.


가난해진다는 것은 신병 훈련소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도 도무지 불만을 터뜨릴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아저씨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실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다들 일이 없을 때를 괴로운 시기로 뽑았다.

그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표정부터 목소리까지 사람의 분위기가 어두워지고 가라앉았다.

눈길은 장화와 땅바닥 사이 어딘가를 향하고 목소리에는 화가 난 듯한 음색이 배였다.

누군가 일이 고되다며 불평이라도 하면(대개는 나였다)누구나 이렇게 대꾸했다.

"이런 일이라도 있어서 다행인줄 알어. 세상에 일 없을 때가 제일 괴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