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황현산 지음)
짧지만 하나 하나의 주제가 깨달음을 주는 글이다.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 주제, 깨달음 이런 것을 한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책값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나를 향상시키는 기회이다.
좋은 글을 옮겨 본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여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즉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전쟁은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구덩이에 파묻히는 시체 더미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이며,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이다....
나는 전쟁이 무섭다. 오만과 증오에 눈이 가려 심각한 것을 가볍게 여길 것이 무섭다.
전쟁을 막을 지혜와 역량이 우리에게서 발휘되지 못할 것이 무섭다.
생각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소비하는 일에만 매달릴 때 그 위기는 피할 수 없다.
강에 댐을 쌓고 하얀 공사를 하고 난 후 나루터가 없어지고 나니 거기서 일하던 기억도 사라지고 말았다고 늙은 사공들은 대답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던가, 선생은 대답대신 한탄을 들었다.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많은 빚을 졌다.
나라를 되찾아 민주화의 터전을 만들고, 주눅든 정신을 들어올리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도 잊혀져버린 사람들이 많다.
기억이 내 존재의 일관성을 보증해준다고 하지만 과거의 어느 시간 속으로 내가 찾아내려 간다면,
나는 거기서 다정하고 친숙한 물건들을 다시 만나기보다, "나는 여기서 산 적이 없다"고 말하게 될 것만 같았다.
물동이를 이는 일은 쉽지 않다.
먼저 똬리를 머리에 얹고, 몸을 낮추어 쪼그리고 앉아, 물이 가득 찬 동이를 수직으로 들어올려 그 똬리 위에 안정시키고는,
몸을 다시 수직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제 몸에 물을 끼얹지 않고 제대로 물동이를 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훈련이 필요하다.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의 삶은 이런 힘든 기술들이 그 구석구석을 받쳐주지 않으면 하루도 지탱하기 어려웠다.
자연이 그 물질성을 야만스럽게 드러내는 궁핍한 삶속에서는 이런 기술을 하나하나 몸과 결합시켜야만
인간이 들어설 작은 자리가 마련되고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에서, 가가스로 제 몫의 물동이를 이게 된 어린 처녀가 하나같이 괴력을 지닌 그 신성가족들 틈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문이다.
산골 마을의 가난한 주인은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며, 그 가난한 살림살이야 한나절의 등짐으로도 다 나를 수 있었을 터이지만,
그 기억의 시간들은 가로지른 빗장에 대못을 박아 감금해두는 수밖에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이 살던 시간들은 기형도의 가엾은 사랑처럼 빈집에 갇혔다.
사소하다는 것은 세상의 큰 목소리들과 엄밀한 이론체계들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감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 때문에 독창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성서가 제 고향에서 선지자인 사람은 없다고 말할 때도, 몽테뉴 같은 사람이 누구도 제 고향에서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할 때도,
거기에는 자신과 자기 이웃의 능력을 믿지 못한 채 편안한 패배주의의 늪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다.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이 슬픔이 유행을 부른다.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사람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삶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 밖에 없다.....
밖의 기호 속에는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진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의 문화는 열등감의 문화와 가장 가가운 자리에 놓인다.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드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새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은 것이나 같다.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그는 영진설비 심부름 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똑똑하게 사는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며, 실제로는 첫머리의 시가 보여주듯 삶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엄숙한 태도를 짓고 있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순결한 사람이 되려고 하며, 한 줄의 시라도 그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기를 바란다.
그가 삶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있다면 그것은 부자유가 금하는 모든 샛길을 다 훓어 진실한 시정을 붙잡기 위해서이다.
이 어려운 일이 늘 뜻과 같을 수는 없어 그는 늘 자신을 죄인으로 여겨 제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잠자리에 들어간다....
그는 헐렁하게 살며 동시에 엄숙하게 산다.
형식은 자유로워야 하지만 그것으로 추구하는 내용은 엄숙해야 한다.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폭력이 폭력인 줄을 알지 못한다.
겸손하지 않은 도덕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기계 뒤에도 사람이 있고 기계 속에도 사람이 있다.
내가 버린 쓰레기도 사람이 치워야 하고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도 사람의 귀에 들어가야 한다.
골짜기에 댐을 막으면 사람의 집이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개펄에 둑을 쌓으면 그만큼 사람의 생명이 흙속에 묻힌다.
사람은 큰 집에서도 살고 작은 집에서도 살고 집이 아닌 것 같은 집에서도 산다.
김정환 <음악의 세계사>
폴 오스터 <달의 궁전>
<파인애플 아미>
<마스터 초밥왕>
에르노 <아버지의 자리>
줌파 라히리 <이름 뒤에 숨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