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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음풍농월. 2016. 3. 31. 20:53

이 책은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라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편지를 묶은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자세가 편지에 나타나 있으며, 참고할 만한 내용 들이다.


당신에게는 단 한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십시요.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요.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요.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요.

이것을 무엇보다 당신이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요.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답을 얻으려면 당신의 가슴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요.

만약 이에 대한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즉 이 더없이 진지한 질문에 대해 당신이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말로 답할 수 있으면,

당신의 삶을 이 필연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가십시요.

당신의 삶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도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슬픔과 소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편린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당신 나름의 믿음 따위를 묘사하도록 해보십시요.

이 모든 것들을 다정하고 차분하고 솔직함으로 묘사하십시요.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당신 주변에 있는 사물들이나 당신의 꿈 속에 나타나는 영상들과 기억 속의 대상들을 이용하십시요.


당신의 일상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당신의 일상을 탓하지는 마십시요.

오히려 당신 스스로를 질책하십시요.

당신의 일상의 풍요로움을 말로써 불러낼 만큼 아직 당신이 충분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요....

심지어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당신의 귀에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감방에 갇혀 있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을,

왕이나 가질 수 있는 그 소중한 재산을, 그 기억의 보물창고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곳으로 당신의 관심을 돌리십시요.

까마득히 머나먼 옛날의 가라앉아버린 감동들을 건져 올리려고 애써 보십시요.

그러면 당신의 개성은 더욱 확고해 질 것이고, 당신의 고독은 더욱 넓어질 것이며,

당신의 고독은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리 비껴가는,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 집과 같이 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견해가 틀렸다면 당신의 내면의 삶의 자연스런 성장이 천천히 그리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른 인식으로 이끌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이 주위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조용히 제 스스로 자라나도록 두십시요.

그와 같은 성장은, 모든 진보가 그렇듯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뻗쳐 나와야 하며, 그 무엇에 의해서도 강요되거나 재촉당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인상과 느낌의 모든 싹이 완전히 자체 속에서, 어둠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 속에서 완성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십시요.

그러고 나서 깊은 겸손과 인내심을 갖고 새로운 명료함이 탄생하는 시간을 기다리십시요.

이것만이 예술가 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를 할 때나 창작을 할 때나 마찬가지 입니다.


예술가는 나무처럼 성장해가는 존재입니다.

수액을 재촉하지도 않고 봄 폭풍의 한가운데에 의연하게 서서 혹시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일도 없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여름은 오니까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1875년12월 체코 프라하 태생.

1926년 12월 자신을 찾아온 여인에게 장미꽃을 꺽어주려다 장미 가시에 찔린 것이 화근이 되어 스위스의 발몽에서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낙안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