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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래비 지음)

음풍농월. 2016. 1. 26. 22:47

이책을 읽으면서 머리 속에 강하게 떠오른 시기가 있다.

한 번은 멋 모르고 가지만, 두 번은 죽어도 안간다는 그 곳.

군대 생활이다.

그 중에서도 신병 훈련소의 생활은 지금 생각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 이였다. 

입대하자 마자 지급되는 지급품... 숟가락, 수통, 소통, 군복 등등.

소지품 검사를 해서 잃어버린 사람은 기합을 받거나, 뭔가 힘든 시간이 주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식사 시간은 3분 남짓, 세면 시간도 여유를 누릴 시간은 없었고, 화장실도 주어진 시간에만 갈 수 있었다.

아침, 저녁 점호는 또 어찌나 긴장되는 순간이였던지.


이 책은 그렇게 힘들었던 군대보다 더욱 힘들었던 시간을 차분하게 소개한다.

특정 시기에 보건 검사를 하여 살릴지 죽일지를 결정하는 아찔한 과정이 있다.

여기 아우슈비츠에서는 마지막은 결국 죽음을 마딱뜨리게 될 시간의 문제다.

그때가 언제든.

그런 운명적인 상황에서 소수의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용소 생활에서 신발이 대수롭지 않은 요소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죽음은 신발에서 시작된다.

신발이 우리 대부분에게 진정한 고문 도구라는 게 드러났다.

그것을 신고 몇 시간 행군을 하고 나면 발이 끔찍하게 짓무르고 치명적으로 감염된다.


자신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뜻을 빨리 포착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화가 닥친다.

이곳에서는 시간 있는 사람도, 참을성 있는 사람도,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도 없다.

맨 나중에 온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구석으로 모여, 벽에 몸을 붙인다. 등 뒤에 든든한 방패막이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다.


빵은 또한 우리에게 유일한 화폐이기도 하다.

빵이 배급되고 그 짧은 몇 분 동안 온 블록에는 고함, 싸움, 욕설이 난무한다.

어제 채권자가 된 사람은 채무자가 지불 능력을 가진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빚을 받아내려고 한다.


명백히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숨을 구덩이를 파고, 껍질을 만들어내고, 주변에 미역하게나마 방어의 울타리를 쳐놓은 인간의 능력은 놀랍기만 하다.


폭이 7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담요 밑에서 누군가와 함께 땀, 체취, 체온을 나눌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사람이 친구이기를 원하는 건 당연했다.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 있다.

이것이 인간 본질이 지닌 속성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에 많은 이름을 부여하며 그 성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문제는 훨씬 단순하다.


겨우내 우리의 유일한 적이었던 추위가 가시자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여 오늘 "배만 고프지 않다면!"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다. 우리 자신이 배고픔, 살아 있는 배고픔이다.


궁핍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사람은 보통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공하거나 추락할 때 옆 사람들의 운명과 연결된다.


수용소 안의 사정은 이와는 다르다. 여기서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한시도 쉴 수가 없다.

모두 절망적일 정도로, 잔인할 정도로 혼자이기 때문이다.

눌아흐첸이 비틀거린다 해도 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한 쪽에서 누가 그를 죽여버린다 해도 마찬가지다.


역사와 삶 속에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져 빼앗길 것이다'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매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공공연히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뒤섞여 쉴 새 없이 끌려다니면서 어둡고 은밀한 고독으로 괴로워하며,

그러한 고독 속에서 어느 누구의 머릿속에 기억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죽거나 사라져간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의사, 재봉사, 구두 수선공, 음악가, 요리사, 매력적인 젊은 동성애자, 수용소 권력자의 친구거나 동향 사람이었다.


가스실로 가는 무슬림들은 모두 똑같은 사연을 갖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런 사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바다로 흘러가는 개울물처럼 끝까지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 진다.


우리는 늘 기다리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낡은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들처럼 완전히 무디고 무기력하게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설 정도로 고통스러워야 할 것 같은, 죽음을 앞둔 나날들도 다른 날들과 다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수용소와 부나의 규칙은 전혀 느슨해지지 않는다.

노동, 추위와 배고픔은 우리들의 관심을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쏟아부을 만큼 엄청나다.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비가 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다. 혹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가 추가로 죽을 배급받을 차례라는 것을 안다.


이제 오늘 하루는 끝이 났고 곧 잊혀진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하루가 아니며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우리는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것을 안다.


자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낼 기운도 없다.


공포는 극도로 전염성이 있다.

공포에 질린 사람은 제일 먼저 도망을 치려고 애쓴다.......

그들처럼 허약한 사람들은 한 시간도 걸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건 무의미했다.

게다가 눈 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구한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말이다.

나는 그 점을 설명해보려고 애썼지만 그들은 대답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은 공포에 질린 동물의 눈 같았다.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


책을 불태우는 사람은 조만간 인간들을 불태우게 될 것이다.  -하이네-


비인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한 이런 추종자들은 타고난 고문 기술자들이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더 위험하다.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회스, 트레블링카 수용소 소장이었던 슈탕글,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병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는 완벽하게 불행할 수 없었다.

수용소에서 자살이 드물었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자살은 철학적인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

일상의 절박함이 우리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 놓았다.

우리는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자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