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굴의 시대(박노자 지음)
우리는 선진국들이 문명이 발달하고 가치 수준도 높을 것이라는 맹종에 젖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백년정도의 시간만 뒤로 돌아가 보면 그들의 수준이 다른 나라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알게 된다.
살아 있는 존재란 이런 것일까?
강자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처럼 인간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알게 된다.
세상에 정의란 강자가 주장하는 것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대중은 여전히 우매하다.
나도 부정의 여지 없이 그에 속함을 인정하게 된다.
전례없이 더러운 시대. 여기서 말하는 '더러움'이란 무엇일까?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리라.
경쟁은 본래 폭력의 일종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사회적 의미에서 평화세력이 없다는 점은 가장 위험하다.
그래도 희망은 마지막에 죽는다.
최근에는 1년에 약 7~8만명의 그리스인이 영원히 고향을 떠나 독일이나 호주같은 핵심부국가로 가고 있고, 그 추세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주로 식당 노동자, 웨이터, 청소 노동자 같은 저임금 노동을 담당한다....
그리스의 유럽연합 가입은 자국의 취약한 제조업에 대한 보호관세와 보조금 지급등을 불가능하게 했다.
대신 독일 등에서 들어온 물건을 원할하게 유통하기 위하여 국산을 고사시켰다....
비록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리스같은 유럽의 주변부 국가는 결국 중심부 열강의 대자본 축적과정에서 이용만 당하고,
지금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직감하고 있는 것 같다....
망가져가는 세상에서는 위에서 하는 거짓말이 종전처럼 더는 통하지 않는다.
이윤추구의 시스템이 다수에게 안정적이고 여유 있는 삶을 가져다준다는 인류 최악의 거짓말이 실체를 보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고통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모양이다.
한국의 수출 위주 경제 모델이 내파될 때 국민이 느낄 고통은 그리스보다 훨씬 무거울 것이다.
그리스에는 그나마 약간의 복지제도라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후기 자본주의 세계에는 세 가지 법칙이 있다.
첫째, 자본에는 국경이 없다는 점이다.
둘째, 핵심부와 준주변부-주변부간의 기술 시차가 거의 없다.
셋째, 자본에는 없는 국경이 노동에는 엄연히 존재한다.
기술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세상에서 자본은 무엇으로 초과 이윤을 창출할까?
바로 국경이 보장하는 노동력의 기동성 억제와 지역별 임금 차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미국에 좌파가 없다는 사실은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실감할 수 있다.
월급을 아예 받지 않고 팁에 의존하는 식당 웨이터의 아부적인 태도에서도,
길거리마다 보이는 배고픈 노숙자에 대한 일반인의 절대적인 무관심에서도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이 체제 반대파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와 무관하다는 점부터 간파해야 한다.
미국은 비민주적인 자본 독재의 사회다. 그런만큼 우리는 미국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남한이 완전히 소멸한다 해도 자유세계의 보루인 미국이 남을 터이니 별 문제가 없다고 장담한,
위대한 애국자요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을 기리는 소집단이 있는가 하면, 유권자 중 적어도 15~20퍼센트는 지금도 박정희를 기리는 듯하다.
사실 대학만큼 상하 간 권력관계가 노골적이고 무자비하게 작동하는 공간도 없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대개 교수라는 권력자는 미시적인 권력관계에서 진보적으로 처신하기 어렵다.
진보적으로 처신하기에는 교수들이 그들을 키운 체제의 논리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촘스키는 책임의 논리에 대해서 논하면서 책임은 특권에 정비례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특권이란 광의의 개념으로 교육이나 사회적 위치도 포함한다.
가령 어떤 발언이나 비폭력적 정치적 행위를 저질러도 감옥이나 고문실로 잡혀가지 않는 곳에 산다는 것도 일종의 특권이다.
인류의 상당수는 표현과 정치적 행위의 자유가 억제되어 있는 체제 안에서 산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오는 압박이 없더라도 먹고 사는 일에 바쁜 절대 다수는 실생활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 한 정치를 사고할 여유 자체가 없다.
그러한 여유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특권이다.
실은 책임의 윤리의식이 강한 사람은 특권적 지식인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기도 하다.
그리고 그 세계에 이미 들어간 사람이 책임의 윤리를 추구할 확률은 매우 낮다....
책임은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경쟁에만 매몰되어 있는 이 나라의 지식인에게는 나와 가족 외에는 관심사가 없다.
경쟁의 세계에서는 타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애초부터 한 수 접고 배운 사람이 지배하는 사회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개인적 차원에서도 지식 그 자체만으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체제가 아무리 악질적이어도 고급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군대의 졸병 이상으로 그 체제에 잘 순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지식이란 일종의 칼이다.
누가 쥐고 있는냐에 따라 그것은 행방의 도구이기도 하고 학살의 도구이기도 하다.
칼을 절대시 하는 문화는 해방보다 학살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지식을 절대시하는 문화 역시 전혀 해방적이지 않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체제에 편입된 지식은 그저 악의 도구일 뿐이다.
지식을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행동하지 못하면 결국 지배자 무리에 포섭되어 이 지옥을 관리하는 악마의 유순한 도구가 될 뿐이다.
한국인의 다수는 서서히 몸이 망가져가는 비정규직의 절망적인 외침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보수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연대 의식은 점차 말라간다.
연대감 혹은 타자를 나의 연장으로 느끼려는 의식이 없는 삶은 아무리 풍복하다 한들 행복할 수 있을까?
현실의 모든 비합리성과 부조리를 어떻게든 합리화하려는 보수주의 철학을 따르면 세상을 아주 가볍게 살 수 있다.
보수주의 기저에는 불완전한 인간과 세계를 그대로 두자는 뜻이 담겨 있다.
양심이란 결국 개인이 사회적 부조리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때 그때의 변명이 무엇이든 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가장 끔찍한 형태의 살육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죽음의 불가피성을 실감하면서 인생의 유한성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제각기 부여하게 된다.
그런 의미 부여 과정에서 바로 '개인'이 성립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개인이라기보다는 타자들 속에 이끌려 흘러다니는 하나의 무력한 개체일 것이다.
타자들과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눌 줄 아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다.... 개인은 심성적인 자립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한 번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나중에 과거의 허송세월을 후회하지 않도록, 비겁하고 좀스러운 과거에 대한 수치심이 마음을 불태우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죽으면서 '내 모든 생명과 정력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 인류 해방 투쟁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인간이면 남의 고통을 진지하게 보고 이해하는 순간 자비심을 낼 것이다.
노암 촘스키 <제국적 야망>
솔제니친 < 수용소 군도>
그레이엄 그린 < 조용한 미국인>
바실리 수호믈린스키 <선생님들에게 드리는 100가지 제안>
수호믈린스키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