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들/책에 있는 글

서재에 살다(박철상 지음)

음풍농월. 2015. 6. 10. 21:36

명나라를 이어 청나라가 들어선 19세기,

조선은 청나라를 배우는 북학이 유행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는 박지원, 박제가, 김정호 등등 위인들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이 책을 통해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이들의 활동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정조에게는 홍재라는 호가 있다....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위대한 학자의 생애였다.

임금이라는 칭호만 떼어버리면 그는 분명히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0책이나 되는 그의 문집 [홍재전서]가 그것을 증명한다.

 

19세기는 북학의 시대였다. 북학이란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용어는 박제가 [북학의]를통해 공론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시발점은 담헌 홍대용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시대 지식인의 진정성이 바로 다음 세대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것을 홍대용은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란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

"任重而道遠","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공자의 말은 바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다.

 

[논어]를 병풍삼고 [한서]를 이불 삼아 생활할 정도였으니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득공은(1748~1807)은 조선 후기 학술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일찍부터 [발해고]와 [사군지]를 편찬한 역사가로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유득공이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발해고]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내세우는 노리에 배치되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200년 전에 후손들이 겪게 될 고초를 예견이라도 한 듯, 유득공은 당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발해의 역사를 연구하여 우리 역사에 편입해놓았던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장흔은 학문이 탈출구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열심히 문장을 익히면 취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취직은 쉽게 되지않았다.

어렵게 취직하여 뛰어난 교정 실력으로 이름이 나기는 했지만 녹봉이 넉넉치 않아 가난을 면키는 어려웠다.

그런 삶을 살았지만 장흔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지극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산속에 자신의 심신을 쉬게 할 수 있는 초가집 하나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노년을 그곳에서 보내리라 꿈꿨다. 장흔은 [평생지]라는 글에서 그런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꽃이 피면 바라보고 나무가 있으면 그 아래에서 쉰다. 과일이 열리면 따다먹고 채소가 자라면 요리를 한다.

유유자적하는 삶이 어찌 자연의 아름다움 뿐이겠는가?....

 

산속에 무엇이 있기에, 경은 뭘 그렇게 못 잊어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무제-

산속에 무엇이 있느냐 물으셨죠?

고개 위의 저 많은 흰 구름이죠.

저 혼자만 즐거워할 수 있을 뿐.

그대에게 드릴 순 없답니다. -도홍경-

 

반고가 하간헌왕을 평가한 말이 '修學好古實事求是'다.

"학문을 연구하고 옛것을 좋아했는데, 충분한 사실을 근거로 믿을 만한 결론을 도출했다"는 의미다.

연경에 머무르는 동안 추사는 자신의 일생을 결정짓는 두 사람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바로 용방강과 완원이다.

이들은 당시 청나라에서 손꼽히는 명사들이었다.

추사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동안 준비해두었던 모든 것을 묻고 또 물으며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수많은 서적과 진귀한 서화, 금석문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마음껏 감상하고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한 분은 옛 경전을 즐기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한 분은 남이 어떤 의견을 내놓는다고 무턱대고 그 의견을 따르는 짓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다.

이것이 두 분 스승의 가르침이었고 내 일생은 이 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어찌 소동파에 빗댈 수 있겠는가. 참으로 추사의 치열함이 느껴지는 고백이다.

 

내가 선석에게 문학과 역사를 공부하라고 권했더니 선석은 머뭇머뭇하며 부그러운 기색을 보이더니 사양하며 말했다.

"제게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이고, 둘 째는 막힌 것이고, 셋째는 미욱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큰 문제점이 있는데, 네게는 이런 것이 없구나.

첫째는 외우기를 잘하는 것인데, 이런 사람이 문제점은 소홀히 하는데 있다.

둘째는 글을 잘 짓는 것인데, 이런 사람의 문제점은 경박한 데 있다.

셋째는 이해력이 뛰어난 것인데, 이런 사람의 문제점은 거친 데 있다.

대게 둔하지만 악착같이 파고드는 사람은 그 구멍을 넓힐 수 있고, 막혀 있지만 소통이 된 사람은 그 흐름이 거침없어지며,

미욱하지만 연마를 잘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거리게 되는 것이다.

파고드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다.

막힌 것은 어떻게 뚫어야 하느냐?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다.

연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부지런하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부지런해지느냐? 마음을 꽉 잡아야 하는 것이다." -정약용-

 

추사의 연행은 19세기 조선 학예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옹방강이 북학의 상징이 된 것도 추사가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조묵 역시 추사와 마찬가지로 옹방강을 스승으로 받들었고, 옹수곤과도 형제처럼 지냈다.

그런데 한 사람은 19세기 학예의 종장으로 군림했고, 다른 한 사람은 패가망신의 지경에 이르렀다.

추사는 청나라 학예를 흡수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지만, 이조묵은 청나라 문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씁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상적은 자가 혜길, 호는 우선이다. 본관은 우봉이며 대대로 역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다.

공자께서는 "날씨가 추운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추사가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는 구하기 힘든 책을 구해다가 제주도에 유배중인 자신에게 보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 할 수 있다....

추사 자신이 제주도로 유배 오기 전에도 이상적은 자신을 무척 잘 대해주었다.

연행을 가면 언제나 자신을 위해 수많은 책들을 구해다주었고,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도 추사는 이상적에게 별다른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이상적처럼 잘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머나먼 바다를 건너 제주도로 온 뒤 사람들은 추사를 이전처럼 잘 대해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소식을 끊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적은 추사가 유배중임에도 이전과 변한 게 없었다.

어렵게 구한 책들을 여전히 보내주었고, 청나라의 새로운 소식을 끊임없이 전해주었다. 추사는 여기서 깨달았다.

공자가 왜 겨울에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늦게 시든다고 말했는지 말이다.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친구가 있으니 하늘 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웃에 있는 듯하네."